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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에 갈 일이 있어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탔다. 열차에 올라 내 자리로 가는데 세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젊고 한 사람은 나이든 분이었다. 나이든 분은 내 옆자리였고 젊은 두 사람은 통로 건너편 앞뒤로 앉아 있었다. 젊은 두 사람이 동시에 내게 말했다. “우리 엄만데요. 같이 앉으려고 하는데 자리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엄마예요.” 내가 머뭇거리자 두 사람이 다시 말했다. “우리 엄마거든요.”
나는 조금 언짢아졌다. 일부러 왼쪽 열의 창쪽 자리로 예매를 했기 때문이다. 오후에 남행 열차를 타면 가는 내내 오른쪽에서 해가 저물어 오른쪽 열 좌석은 눈이 부시다. 자리를 바꾸면 오른쪽에 앉아야 했다. 모녀는 지금도 통로를 사이에 두긴 했지만 옆자리였다. 기차 타고 미국 가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세 시간쯤 갈 텐데 꼭 붙어 앉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바꿔줄 수밖에 없었다. 딸들이 부탁할 때 그 어머니도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상황을 보고 듣고 있었다. 매몰차게 거절하면 도착할 때까지 뒤통수가 따가울 것이었다. 두 딸은 연신 고맙다고 내게 인사를 했다. 세 모녀는 무슨 일로 서울에 함께 왔다가 내려가는 걸까. 가족이나 친척 결혼식에 왔을까. 혹시 어머니가 편찮아서 서울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나란히 앉은 모녀는 간식을 나눠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눴다.
두 딸이 “우리 엄마”라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이 귀에 맴돌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기차 여행을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단 한번도 없는 것 같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자동차로 여행한 적은 있었다. 그럴 때면 으레 아버지가 조수석에, 어머니는 뒷좌석에 앉으셨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자동차 나들이한 기억이 떠올랐다. 폐암 수술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저녁에 부모님과 함께 드라이브에 나섰다. 강변도로를 달리다가 올림픽대교에 다다랐을 때 어머니는 “저거 올리다가 사람 죽었지?” 하고 말했다. 올림픽대교 주탑 꼭대기에 조형물을 설치하다가 헬기가 추락했던 사고 이야기였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저게 뭐라고 사람까지 죽어가면서 그랬다니.”
그 짧은 드라이브에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란히 앉아 기차 여행을 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추억이 남았을까.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져서 읽던 책을 덮었다. 옆을 힐끗 보니 어느새 모녀는 서로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기대어 잠들 수 없었을 것이다. 구례구역에서 내릴 때 딸이 “감사합니다” 하고 또 인사했다. 나는 잠시나마 속으로 투덜거렸던 게 미안해서 머리를 깊이 숙였다. 세 모녀를 태우고 여수로 가는 열차를 보며 속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엄마 생각을 잠깐 했어요. 우리 엄마 말이에요.’


한현우
신문기자 이력 30년 중 대부분을 문화부 기자로 글을 써왔다. 일간지 문화2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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