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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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쯤이면 명동에 가야 한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는 더욱 그렇다. 세모를 밝히는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조명, 오색으로 반짝이는 나무들, 화려한 장식을 내건 상점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길가 음식, 캐럴이 흘러나오는 골목 카페, 성당의 은은한 종소리, 비에 젖은 바닥의 전단들, 분주하면서도 들뜬 사람들의 발걸음….
이제는 명동이 서울의 심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백화점과 중소규모 호텔 몇 곳을 빼고는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작은 옷 가게와 액세서리 상점, 국적 불문 다양한 메뉴의 식당이 골목골목 밀집해 있을 뿐이다.
젊은이들은 명동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회나 추억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월의 더께가 쌓인 이들에게 명동은 영원한 명동이다. 이들에게 명동과 그 옆의 충무로는 지금의 청담동이요, 홍대앞이다. 명동은 특정한 한 세대의 지난 세월에 특별한 정서를 부여한다.
그건 광복의 환희와 상처, 서양 문물, 낭만, 자유연애, 시, 음악, 영화 그리고 정한, 회한, 애달픔 같은 것이다. 50년대, 60년대에 김수영과 박인환, 전혜린, 명동백작(이봉구) 같은 장안의 글쟁이들과 지식인들, 음악 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연극 하는 사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명동의 다방과 선술집을 드나들었다. 충무로 수도극장(스카라 극장)과 명보극장은 전후 피폐해진 서민의 마음을 달래주는 명소였다.
1970년대 청춘들은 명동의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청년문화의 시동을 걸었다.
연고전(고연전)이 끝나면 두 학교 학생들은 거리 행진을 했는데 합류하는 목적지는 명동이었다.
명동을 소재로 삼은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곡들은 당연히 꽤나 오래된 것들이다.
1949년 현인의 ‘서울야곡’, 1961년 고운봉의 ‘명동부르스’, 1970년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거리’가 10년 간극을 두며 가장 명동스러운 정서를 담은 노래다.
그 후에도 명동이 나오는 노래는 있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엔
찢어 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이 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엔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깃 쓸어 올리며 오늘 밤도 울어야 하나
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1950년, 작사 유호, 작곡·노래 현인)
‘서울야곡’은 충무로, 종로, 명동 등 서울 번화가의 풍경에 쓸쓸하고 우울한 도시의 정서를 입힌 서정적 노랫말, 일본 엔카풍의 트롯이 대세이던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양의 탱고 리듬으로 크게 히트했다. 쇼윈도우, 그라스, 마로니에, 레인코트, 베가본드, 엘레지 같은 영어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넣어 당시로서는 꽤나 모던하고 이국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한 폭의 우울한 풍경화다. 비가 오고 있었는지 젖은 유리창은 눈물이요, 찢어버린 편지는 한숨이다. 거리에 버려졌으나 꺼지지 않는 담배는 미련이고, 네온마저 꺼진 밤거리에 나뒹구는 꽃다발은 실연이다. 그 풍경 속으로 레인코트 깃을 올린 사나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걸어간다.
‘신파’다. 신파는 전염성이 강하다.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며 한없이 쓸쓸해진다. 탱고의 빠른 리듬감은 슬픔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더 상승시킨다.
신파는 ‘통속’이다.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통하는 일반적 정서다. 대중의 원초적 공감대를 건드리는 것이다. 백화만발한 현대의 대중문화에서 신파와 통속은 저급한 삼류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큼 또 카타르시스를 주는 건 없다.
신파와 통속의 냄새가 전혀 없는 H.O.T나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를 듣고 자란 세대도 나이 먹으면 신파스럽게 변해간다.
나는 ‘서울야곡’이 신파와 통속의 과잉이라서 편하고 좋다. 무려 70년도 더 지난 노래지만 지금도 들으면 가슴이 촉촉해진다. 비에 젖어가는 명동거리가 내다보이는 재즈바 창가에 누군가를 기다리든 아니든 망연히 앉아 있는 나의 청춘이 오버랩된다.
누가 그런 정서를 유치찬란하다고만 할 것인가. 신파(新派)는 어쩔 수 없는 한국적 DNA다. 지금도 많은 드라마는 신파의 공식을 따르고, 갑자기 대중문화의 전면에 부상한 트롯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고급문화 애호가들은 신파가 예술적 조탁 없이 억지스럽게 슬픔과 웃음을 유도하고 강요하는 뻔한 것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한국 대중문화는 신파를 자양분으로 살아왔고 그 생명은 길다.
‘서울야곡’의 가사와 선율은 꽤나 유려하고 세련된 신파여서 많은 후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현인 목소리를 빼닮은 조명섭 버전, 무심한 듯한 전영 버전, 재즈로 편곡한 말로의 리메이크가 참 듣기 좋다.
‘서울야곡’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발표됐다. 당대의 최고 방송작가이자 작사가인 유호(2019년 작고)가 노랫말을 지었고 현동주가 작곡한 걸로 나온다. 현동주는 가수 현인(2002년 작고)의 본명이다. 그의 노래 중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은 유호 작사다. 현인은 당대의 남인수와 라이벌이었다.
유호는 이 노래 외에 ‘낭랑 18세’, ‘맨발의 청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불후의 대중가요를 쓴 이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밤거리에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그대를 태양처럼 그리워하는/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맨발의 청춘’은 신파와 통속의 극치다.
고운봉이 1961년 부른 ‘명동 부르스’로 넘어간다. 이 노래는 만요(1930년대의 희극적인 풍자곡)가수로 유명했던 김용만이 작곡(작사 이철수)하고 취입한 노래였으나 고운봉이 고쳐 불러 유명해졌다.
“궂은 비 오는 명동의 거리 가로등 불빛 따라
쓸쓸히 걷는 심정 옛 꿈은 사라지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밤이 다 새도록
울면서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여
깊어만 가는 명동의 거리 고요한 십자로에
술 취해 우는 심정 그 님이 야속튼가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청춘 시들도록
목메어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여”
명동은 ‘부르스’(blues)라는 말이 어울린다. 부르스는 애조를 띠면서도 자유롭고 즉흥적인 정서다. 이 노래 가사 역시 신파조다. 비에 젖은 명동 거리에서 술에 취해 울고, 시들어가는 청춘과 떠난 님에 가슴 아파하는 가사는 다를 바 없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으로 시작하는 ‘대전 부르스’도 (1956년, 작사 최치수, 작곡 김부해, 노래 안정애) 무대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날은 명동에 가야 한다. 그게 명동의 감상(感想)이다. 사랑의 상처와 청춘의 회한은 가로등 불빛 아래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다시 돋아나고 다시 아문다. 궂은 비 내리는 명동의 밤거리를 술 취해 쓸쓸히 걸어갈 때 인생은 그저 삼류 대중잡지의 표지처럼 한 편의 통속이거늘, 우리 인생에서 신파를 빼면 뭐가 남을까.
10년을 뛰어넘어 1970년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거리’를 듣는다.
“비 내리는 명동 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사나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믿었다 잊지 못하고
사나이 가슴 속엔 비만 내린다
비 내리는 명동 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 밤
뜨거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울면서 떠난 사람아
나를 두고 떠났어도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사랑해 잊을 수 없다
외로운 가슴 속엔 비만 내린다”
(백영호 작사·작곡)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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