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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켈틱 펑크의 주정뱅이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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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인 맥고완, 그리고 그가 결성한 밴드 포그스(The Pogues)는 아일랜드 전통 음악과 펑크를 독특한 형태로 융합했다. 그리고 이것은 ‘켈틱 펑크’라 지칭됐다. 

친숙한 아이리쉬 멜로디를 바탕으로 셰인 맥고완은 본능적으로 청취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날것의 가사를 써내려 갔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을 묘사하고 사랑과 상실을 탐구했으며 단순한 스토리텔링 그 이상의 생생한 감정들을 노래했다. 

위스키에 절여진 이야기, 그리고 이민에 대한 불운한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아일랜드 이민자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들은 의외로 전세계 팬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 노래 들에는 셰인 맥고완의 자유로운 정신이 반영되어 있었다. 

셰인 맥고완(오른쪽 첫번째)이 2011년 오스트리아에서 공연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EPA/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런던의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와 영국을 오가며 유년 시절을 보낸 셰인 맥고완에게 있어 아일랜드는 평생동안 그의 상상력과 열망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제임스 조이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며 문학적 사고를 했던 셰인 맥고완은 부모님의 기대 아래 공립 학교가 아닌 런던의 명문 사립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입학했고 장학금까지 받았다. 하지만 재학 도중 약물문제로 퇴학당하고, 우울증까지 겪으면서 십대 시절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1970년대 중반 영국에는 펑크 록이 폭발했고 그는 이 자유로운 음악이 흐르던 시절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회고했다. 사람들은 펑크를 혼돈이라 불렀지만 셰인 맥고완은 이것이 혼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 언급했다. 

니플 일렉터스라는 밴드에 합류했던 셰인 맥고완은 이후 포그스를 결성했다. 이는 일반적인 펑크 록은 아니었고 아일랜드 전통 포크 멜로디를 벤조, 틴 휘슬, 아코디언을 포함한 악기들과 결합시킨 형태였다. 그리고 이 융합은 음악적 규범을 초월했다. 

펑크 록을 보러 온 청중들에게 아일랜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고 이 런던 아이리쉬 밴드는 마침내 이 공식을 성공시켰다. 셰인 맥고완은 더 강하고 더 실제적인 분노의 감정을 팝 음악의 중심, 그리고 팝 음악 청중들의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싶어 했다.

포그스는 1984년 데뷔 앨범 를 발표하고 이후 공개한 걸작 의 경우 모든 곡이 완벽한 앨범이었다. 술 취한 사내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철도 노동자들에 관한 내용들이 진지한 멜로디와 함께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흘러갔다. 

‘The Body of an American’ 같은 곡은 미국 TV 시리즈 <와이어>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포그스가 지닌 격렬한 에너지는 일반 펑크 록 밴드들의 껍데기 뿐인 에너지와는 결 자체가 달랐고 이는 더욱 직접적으로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포그스는 유럽을 넘어 미국, 그리고 일본에까지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간 누적되어 왔던 셰인 맥고완의 술과 마약으로 인한 신경쇠약 때문에 미래는 불투명해 보였다. 

10대 때부터 단 한 번도 술에서 깬 적이 없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셰인 맥고완의 알콜 중독 상태는 심각했고, 공연장에서 노래를 엉망으로 하는 것은 물론 직접 밴드의 앨범 판매를 방해하는 등의 기행마저 보이기도 했다. 결국 1991년 무렵 일본 투어 중 포그스의 멤버들이 셰인 맥고완을 해고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그의 헌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셰인 맥고완 앤 더 포프스’라는 새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잦은 멤버 교체가 있던 포그스 또한 시간이 흘러 원년 멤버들이 재결성한 가운데 결국 2000년대에 셰인 맥고완까지 합류하면서 완전체로써 공연을 이어 나갔다.

셰인 맥고완은 경력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술, 그리고 약물과 싸웠다. 이것들이 셰인 맥고완의 음악에 영감을 줬지만 반대로 그의 음악적 성취를 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무대 안팎에서 소란과 혼란을 불러 일으켰고 밴드 멤버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시네이드 오코너의 경우 셰인 맥고완이 헤로인을 사용하지 못하게끔 경찰에 헤로인 소지 혐의로 신고까지 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셰인 맥고완은 시네이드 오코너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셰인 맥고완은 담배 또한 놓지 않고 살았고 이로 인해 젊은 나이서부터 부러지고 썩어버린 치아는 그가 거친 이미지를 가지게끔 하는 데에 일조했다. 2015년 무렵 전체 임플란트를 받는 것이 다큐멘터리로까지 만들어졌고 이는 영국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그의 시술은 “치과 치료계의 에베레스트 등정”이라 묘사됐다. 치과 치료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인해 골반이 부러지게 되고 눈을 감는 날까지 휠체어를 사용했다.

2016년에는 셰인 맥고완의 60번째 생일을 맞이해 당시 아일랜드 대통령으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그리고 더블린 국립 콘서트홀에서는 시네이드 오코너와 U2의 보노, 닉 케이브 등의 축하 콘서트가 진행됐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자리에 있던 사람 중 그 누구도 셰인 맥고완이 60살까지 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포그스의 가장 유명한 곡은 아마도 ‘Fairytale of New York’일 것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데보라의 테마’ 멜로디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발라드의 가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게 경찰서 취객 수용실을 배경으로 시작하며 욕설 또한 난무한다. 

1987년 12월 공개됐을 무렵 아일랜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마치 머라이어 캐리의 곡처럼 아일랜드와 영국 싱글 차트에 재진입하면서 진기록을 세웠다.

2022년 말, 셰인 맥고완은 바이러스성 뇌염 진단을 받은 후 몇 달 동안 더블린에 입원해 있었다. 그 무렵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밥 딜런이 문병을 왔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의 생일-크리스마스날 태어남-을 앞두고 퇴원했지만 크리스마스가 채 한달 가량 남은 시점인 2023년 11월 30일 눈을 감았다. 

위에 언급한 ‘Fairytale of New York’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어느 노인이 말했지, 다음 크리스마스는 살아서 보긴 힘들겠다고”

셰인 맥고완의 관을 실은 운구차가 지나가는 가운데 많은 팬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Damien Eagers/PA Wire/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2월 8일에 진행된 셰인 맥고완의 장례식장 밖에서 브라스 밴드가 ‘Fairytale of New York’을 연주했으며, 장례 미사에서는 영화 <원스>로 알려진 글렌 한사드가 이 곡을 불렀다. 적어도 아일랜드에서는 이번 크리스마스 주간에 분명 ‘Fairytale of New York’이 차트 정상을 찍게 되지 않을까 싶다. 

셰인 맥고완의 장례식 장에는 약 6천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교통이 통제됐고 TV에서 생중계됐다. 장례 미사에서 보노는 성경을 읽었고 절친했던 영화 배우 조니 뎁은 직접 관을 운구했다. SNS를 거의 하지 않는 톰 웨이츠 또한 SNS에서 직접 셰인 맥고완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셰인 맥고완은 시인이자 몽상가이며 사회 정의의 옹호자였다. 그 만큼 아일랜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준 사람은 없었다. 성스러운 성가부터 시궁창 속 삶까지,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부드러운 사랑노래부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부랑자에 관한 이야기까지 구원과 불안, 기쁨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러는 사이 펑크와 포크, 그리고 아일랜드 전통음악의 경계가 무너졌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색다른 음악적 경로를 탐구할 수 있게끔 영감을 줬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장르의 융합을 이뤄내는 한편 그의 선구자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유명 S모 스트릿 브랜드에서 출시한 그의 사진이 프린팅 된 티셔츠는 한국의 힙합 아티스트들 또한 입고 다니기도 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TV 토크쇼에 출연해 셰인 맥고완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나면 우리 대부분이 잊힐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셰인의 음악은 계속 기억되고 노래될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미래를 노래하지 않네.

과거를 꿈꾸지도 않지.

나는 처음을 말하지 않네.

마지막을 생각하지도 않지.”

-[A Rainy Night in Soho] 中.

☞ 추천 음반

◆ Rum, Sodomy and the Lash (1985 / stiff, MCA)

엘비스 코스텔로가 프로듀스한 이들의 대표작. 앨범 제목은 윈스턴 처칠의 말에서 인용한 것으로, 영화 <아이다호>에 삽입된 ‘The Old Main Drag’을 비롯 앨범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고전이 됐다. 

엘비스 코스텔로는 이 앨범의 프로듀스 작업에 대해 “자신의 임무는 더 전문적인 프로듀서가 이들을 망치기 이전에 이들의 황폐한 영광을 포착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음됐음을 일러 뒀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앨범이다.

한상철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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