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이 한 자전거 5개월 만에 환상 호흡 “장애·비장애 넘어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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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항저우장애인아시안게임 ‘탠덤사이클’ 3관왕 김정빈·윤중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지난 10월 개최된 2022 항저우장애인아시안게임(APG)에서 시각장애 사이클선수 김정빈이 세 번째 금메달을 따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든 생각이다. 그는 4000m 개인추발, 18.5㎞ 도로독주, 69㎞ 로드레이스에서 모두 시상식 맨 윗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 장애인 사이클선수가 국제대회에서 거둔 첫 번째 3관왕이었다. 이 역사적 순간마다 그의 곁에는 파트너 윤중헌이 있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김정빈과 ‘탠덤사이클’을 탔다. 탠덤사이클은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조를 이뤄 하나의 자전거를 같이 타는 종목이다. 비장애인은 앞에서 자전거를 이끌며 페이스를 조절하고 방향을 잡는 ‘파일럿’ 역할을 한다. 시각장애인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이유, 그 힘이 바로 파일럿에게서 나온다. 파일럿 역시 정식 선수로 인정된다. “나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라 더욱 기쁘다. 탠덤사이클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아름다운 종목이다.”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윤중헌이 말했다. 두 선수는 APG 대한민국 선수단의 MVP로 선정됐다.
이들의 거침없는 질주는 계속됐다. APG 직후 열린 제43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경기 첫날(11월 3일) 개인추발 4000m에서 한국 신기록(4분 35초 861)을 갈아치운 것. 이어 도로독주 22.4㎞와 트랙 스프린트 200m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추가하는 등 두 사람은 엄청난 저력을 과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만난 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정빈은 APG를 앞두고 호흡을 맞춰온 파일럿이 부상을 당하면서 지난 5월 윤중헌과 짝을 이뤘다. 윤중헌은 4년 차 현직 소방관이자 사이클 동호인이다. 즉 운동선수가 아니다. 대부분의 파일럿이 경륜 등 사이클선수 출신임을 감안하면 불리할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김정빈은 누구보다 사이클에 ‘진심’인 윤중헌을 믿고 한 자전거에 올랐다. 윤중헌은 일과 훈련을 병행하면서도 선수 이상의 기량으로 이에 화답했다. 사이클에 대한 열정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데 대한 고마움이 그의 동력이었다.
두 사람은 1991년생 동갑임에도 ‘정빈 님’, ‘중헌 선수’로 서로를 깍듯이 부른다. 식사 자리에선 윤중헌이 김정빈에게 일일이 반찬 위치를 알려줬고 이동할 땐 늘 손을 맞잡고 걸었다. 윤중헌이 자리를 비운 사이, 김정빈은 그가 돌아왔을 때 곧장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손으로 자전거를 더듬으며 준비태세를 갖췄다. 함께 있건 떨어져 있건 서로에 대한 배려가 온몸에 배어 있었다. 하나의 자전거를 두 사람의 힘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란히 앉은 그들 사이에 잠시 끼어들었다.
이번 APG에 출전한 세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내는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윤중헌(이하 윤) 4000m 개인추발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땄을 때 가장 울컥했다. 원형 경기장을 계속 뺑뺑 도는 트랙 종목인데 동호인 출신인 나는 경험이 없었다. 특히 혼자 하기도 어려운 종목을 둘이서 하려니 무척 힘들었다. 우리나라엔 국제 규격에 맞는 트랙이 비장애인 국가대표선수촌에만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와 장애인사이클연맹의 지원으로 선수촌에서 트랙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장애인 선수는 물론 나 같은 동호인에게는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기대하지 못했던 종목에서 메달을 따서 더 기뻤다.
김정빈(이하 김) 모든 경기가 뜻깊다. 도로독주는 주종목이라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목표를 이뤄서 좋았다. 로드레이스의 경우 둘이 함께 도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만난 시간이 짧기 때문에 그동안 나갈 수 있는 경기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소통이 잘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처음 다섯 바퀴는 우리가 독주하다시피 했다. 함께 소리 지르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정말 짜릿했다.
만난 지 5개월밖에 안 됐다. 어떻게 이런 호흡이 나올 수 있나?
김 중헌 선수는 동호인이지만 그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데이터(경기 기록)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여러 파일럿을 경험해봤지만 특히 중헌 선수와는 소통이 무척 잘된다. 소통은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동갑임에도 존대를 하는 이유다.
윤 경기 중에는 상대 팀을 견제하는 건 물론 전략에 따라 그들을 이용하기도 해야 한다. 또 오르막, 내리막, 오른쪽 코너, 왼쪽 코너 등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신경 쓸 것이 무척 많다. 그런데 정빈 선수는 내 이야기만 듣고 따라올 수밖에 없다. 순간순간 어떻게 힘을 줘야 하고 상대 팀은 지금 어떻게 타고 있는지 등 경기 중 소통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차분한 성격, 반려견, 음악 등 공통점도 많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20~30년은 된 친구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자전거를 두 사람이 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윤 한강에서 연인들이 타는 커플 자전거를 생각하면 쉽다. 하지만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앞 선수는 페달을 부드럽게 돌리는 스타일인데 뒤 선수는 끊어서 찍어 누르는 식으로 타면 이질감이 많이 든다. 페달을 밟는 주법 등 혼자 탈 때는 아무렇지 않게 해나갔던 것들 하나하나를 다 맞춰야 한다.
장애인 스포츠지만 비장애인이 참여한다. 파일럿의 역량이 더 크게 작용할 경우 문제가 되지는 않나?
김 파일럿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이번 아시안게임에도 카자흐스탄의 유명 사이클선수가 파일럿으로 출전했다. 엄청난 경쟁자였지만 뒤 선수가 받쳐주지 못하니 예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파일럿 요구에 맞춰 뒤 선수가 얼마나 합을 잘 맞추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다. 파일럿이 아무리 잘해도 두 선수의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저항만 두 배, 세 배로 커지는 셈이다.
김정빈은 중학생 때 진행성 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 판명을 받았다. 20대 초반부터 시력이 급격이 나빠지면서 지금은 ‘저시력’이 됐다. 김정빈은 “사람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처럼 실루엣만 보이는 정도”라고 했다. 사이클을 만난 건 7년 전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다. 흐릿한 세상을 사는 그에게 사이클은 달릴 수 있는 자유를 선사했다. 장애가 있어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윤중헌이 파일럿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이클 동호회를 통해 만난 박찬종 선수를 통해서다. 2022년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박찬종이 장애인 사이클 선수로 전향해 재기한 모습은 큰 울림을 줬다. 이때 장애인 선수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그에게 소명 같은 것이었다. 장애인 선수들을 보며 배운 것도 많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하는 건 세상을 향한 ‘관점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김정빈은 대학에서 기타를 전공하고 밴드 활동도 했다. 기타를 포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 김정빈에게 물었다.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지 않았나?
스무 살 때까지는 기타를 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시력이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기타를 눈으로 보고 치는 게 어려워졌다. 밴드 멤버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취미 정도로 즐긴다.
사이클을 시작할 때 두려움은 없었나? 자전거를 탈 때 어떤 기분인가?
당시엔 뭐라도 해보고 싶어 뭐든 다 도전했다. 크로스컨트리, 역도 등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쇼다운(시각장애인 구기 종목)은 국가대표까지 했다. 결국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모두 출전할 수 있는 사이클을 택했다. 시력이 나빠진 뒤로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뛰는 일’이었다. 사이클은 그걸 가능케 했다. 자전거를 탈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 달리는 동안 거리의 냄새가 달라지고 공기의 온도도 변한다. 바람을 가르고 눈비를 맞으면서 자연을 느끼고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인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며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고.
감사하게도 장애인 운동선수 기업 고용 진흥 정책에 따라 하루 네 시간 훈련은 업무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장애인 스포츠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장애인 사이클은 아직 실업팀이 없다. 내년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내 뒤에 오는 선수들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파일럿도 마찬가지다. 장애인 선수와 함께 메달과 포상금을 받지만 연금 등의 혜택은 없다. 이들에 대한 처우가 좋아져야 장애인 사이클도 발전한다.
현직 소방관인 윤중헌 역시 일과 훈련을 병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직장과 훈련장이 있는 전북 순창까지는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에게 물었다.
본업과 훈련을 병행하기 힘들지 않았나?
내가 일하는 곳은 경기 남양주소방서다. 훈련장이 있는 순창까지는 네다섯 시간이 걸린다. 퇴근한 뒤 곧장 순창으로 내려가 바짝 훈련을 하고 다시 올라오는 걸 반복했다. 고됐지만 아시안게임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기꺼이 견뎌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훈련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귀했다. 체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정말 열심히 했다.
파일럿은 장애인 선수의 ‘눈’이자 ‘손’이다. 부담감은 없었나?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출력이 하나 더 생기니 속력이 빨라졌다. 희열감을 느꼈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타면 방향을 잡는 건 더 어렵다. 처음에는 내가 생각한 대로 나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나 때문에 정빈 님이 다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호흡이 맞기 시작하니 신이 났다. 일상에서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걱정했지만 정빈 님은 많은 걸 스스로 한다. 장애인 선수가 아닌 그저 동료로 느낀다.
파일럿으로 달리는 경험은 삶에 어떤 자국을 냈나?
APG에서 두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선수가 사이클을 타는 걸 봤다. ‘이런 게 진짜 스포츠구나’ 싶더라. 장애인 선수들을 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내가 삶에서 느끼는 순간적인 고민, 힘듦은 때가 되면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장애인 선수들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장애인 스포츠가 보여주는 위대함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들의 ‘동행’은 다름에 대해,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도움을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경계를 지워가며 김정빈과 윤중헌은 오늘도 힘차게 페달을 돌린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이 웃는다는 걸 두 바퀴로 증명해내면서.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 중헌 선수를 만나 값진 경험을 많이 했다. 사이클을 타면서 지금처럼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이 없다. 내년엔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함께 시상대에 오르고 싶다.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중헌 선수도 소방관으로서 다치지 말고 함께 남은 도전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윤 미래를 향해 함께 달리는 파트너가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사이클을 타며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해왔는데 정빈 님과 함께 하는 것만큼 행복한 도전은 없었다. 앞으로도 친구로 동반자로 계속 함께 달리고 싶다.
조윤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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