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산타 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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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30분. 외투를 걸쳐 입고 어두운색 모자를 끝까지 푹 눌러쓴다. 나가기 전 마스크까지 꺼내 쓰면 외출 준비 완료. 눈만 빼꼼 나온 내 모습에 안심이 된다. 바쁘게 걸음을 옮겨 약속 장소로 향한다. 그 사람과 만나기로 한 곳은 집 근처 공사장 앞. 하얗게 질린 달빛 아래의 공사 현장은 불시에 맞닥뜨린 적에게 먹힌 거대한 짐승의 흔적처럼 서늘하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얼마간 기다리니 맞은편에서 나와 비슷한 차림새를 한 사람이 걸어온다. 사방을 살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맞다 싶다.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아마도 저를 찾고 있는 듯한데….’
그가 눈빛으로 답한다.
‘제가 찾는 그분이 맞으시죠?’
어깨에 약간의 긴장을 얹은 채로 다가가 암호 같은 한마디를 속살거린다. “당근…?”
암호를 확인한 우리는 비로소 안심하여 데시벨을 높인다. 내가 인사와 함께 건넨 쇼핑백을 받아든 상대방이 눈을 반달처럼 구부리며 웃는다. “감사해요. 아 잠시만요.” 그가 주머니에서 유리병에 든 뽀얀 베지밀을 꺼내어 내민다. “나눔 감사해요. 늦은 밤이라 커피는 뭐해서 이거라도.” 받아든 베지밀이 따뜻하다. 혹시 당신의 마음으로 데운 건가요? 실없는 농담을 하려다가 “아이 뭐 이런 걸 다.” 멋쩍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뒤돌자마자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린다. “당근!”
새해를 맞기 전 큰마음 먹고 대청소를 하는 중이다. 쓰지 않고 모셔만 둔 물건들이 오랜만에 서랍장 밖으로 나왔다. 어디 하나 망가진 곳 없이 멀쩡한 물건들이지만 지금 이대로 다시 서랍장에 넣는다면 아마 다음 대청소까지 나올 일 없을 게 분명하다. 버릴까도 싶었지만 이렇게 멀쩡한 물건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은 지구에 짓는 죄를 또 하나 늘리는 일이 분명했다. 혹시나 해서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으로 올려봤다. 누가 가져가긴 하려나 싶었는데 예상 외로 폭발적인 반응 덕에 이틀 동안 스무 번이 넘는 나눔을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쓰지 않는 물건을 건넸을 뿐인데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황송함에 마음이 촉촉하다. 우리 집 구석에서 쓸모를 잃어버리고 그저 늙고만 있었던 물건들이 저편 누군가의 손끝에서 생기를 되찾는 상상을 해본다. 오랫동안 먼지만 쌓여 있던 화병에 꽃과 물을 담는 아주머니, 언젠가 사은품으로 받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릇에 푸짐한 음식을 맛깔스럽게 담아 첫 자취 기념 집들이를 하는 사회초년생, 오래전 읽고 책꽂이에 꽂아만 두었던 소설을 등굣길에 읽는 중학생. 마치 내가 우리 동네 산타라도 된 기분이다. 새 물건은 아니고 헌 물건을 선물했으니 친환경 산타쯤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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