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역사 품은 미륵사지 터 숨은 박물관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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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익산박물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료 무료
주차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예약 별도 예약 없이 관람 가능(단체는 사전 연락)
문의 063-830-0901
국립익산박물관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국립익산박물관의 주소다. 익산은 마한·백제 문화권의 중심 지역으로,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모서리를 받쳐줄 유물과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특히 박물관이 위치한 금마면은 고조선 준왕의 새로운 터전이었고 고대 마한의 중심지였다. 다산 정약용은 1811년 편찬한 역사지리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마한은 지금의 익산군으로, 금마는 마한 전체 총왕의 도읍’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밖에도 통일신라 문무왕 때는 고구려 왕족 안승과 유민들이 세운 보덕국이 있었고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 견훤이 마한과 백제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며 왕궁을 지었던 곳이다. 무엇보다 금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백제 무왕이다. 금마에서 나고 자란 무왕은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사비 부여를 떠나 금마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일까? 금마면 일대는 많은 유적이 밀집해 있다. 미륵사 터를 중심으로 고대 동아시아 도성 개발사의 한 축을 차지하는 왕궁리 유적, 백제의 마지막 왕릉으로 주목받는 쌍릉, 백제 1탑 1금당 가람 배치의 완성형 제석사지(帝釋寺址), 고도리(古都里) 석인상, 익산토성(오금산성), 태봉사 삼존석불, 연동리 석불좌상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익산시 온라인 지식백과 디지털익산문화대전 누리집에서 ‘금마면’을 검색하면 지정문화재부터 유적과 유물에 이르기까지 총 301개 자료가 뜬다. 더욱이 각각의 유물과 유적이 차로 10여 분, 도보로도 30여 분이면 모두 연결되니 찬란한 역사를 품은 고도임은 확실하다. 그 중심에 현재의 국립익산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터’
2020년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은 3만 9695㎡ 부지(연면적 7499.69㎡)에 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로 건립됐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국보) 해체 보수 작업 과정에서 다량의 사리장엄구가 출토됐고 2015년 7월에는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미륵사지를 비롯해 익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와 활용의 필요성이 커져 박물관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국립익산박물관 소개에 앞서 박물관이 들어선 장소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미륵사지(彌勒寺址)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지(址)는 터를 뜻한다. 그러니까 경주 불국사처럼 건물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륵사 절이 있던 터만 남아 있는 것이다. 대체 미륵사가 어떤 절이었기에 그 터만 가지고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세운 절로 동서 260m, 남북 640m, 대지면적 16만 5289㎡(5만 평)가 넘었다. 우리나라를 넘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가람(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이었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창건 설화가 전한다. 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왕비의 부탁으로 무왕은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주요 공간을 둘러싸며 지붕이 있는 복도)을 짓고 ‘미륵사’라 했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미륵사는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해 평지를 조성했으며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불교경전 내용에 따라 가람 배치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는 1974년부터 이어진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보이지 않는 박물관
국립익산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미륵사 터에 건립됐다는 것은 익히 알고 갔지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박물관 안내 화살표를 따라 한참을 가도 좀처럼 박물관 건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미륵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두 개의 석탑뿐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지하로 길고 완만하게 뻗은 경사로가 보였다. 바로 박물관 입구였다. 주차장 진입로부터 그저 약간 솟은 언덕이라고 생각한 곳이었다.
이는 미륵사지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박물관’이라는 건축 개념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건축된 후에도 박물관이 미륵사지 터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경관으로 어우러져 보일 수 있도록 시설의 절반 이상을 지하화하는 등 지상 노출을 최소화했다. 덕분에 국립익산박물관은 석탑과 미륵사지 터를 둘러싸고 있는 용화산, 남측 연못 등 주변 자연 속에 스며들 듯 자리잡고 있었다. 1400여 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터를 존중하면서 박물관으로서 존재감도 잃지 않은 국립익산박물관은 2020년 한국건축문화대상(KAA) 준공건축물 부문 본상, 2023년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가 주관하는 제8회 한국문화공간상을 수상했다.
‘보이지 않는 박물관’이란 말은 그저 수식이 아니다. 가보면 안다. 분명히 건축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건축물이 없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선 후에도 ‘설마 여기가 박물관?’ 반신반의하게 된다. 국립익산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미륵사지 터를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경사로를 통해 지하로 들어가 수많은 백제의 유물을 보고 나서야 ‘아, 여기가 박물관이었구나!’ 하고 알아차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서동의 마는 계속 맛볼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는 크게 실외의 유적 영역과 전시관 영역(국립익산박물관)으로 나뉜다. 먼저 실외 유적 영역은 국보 미륵사지 석탑을 중심으로 동원 구층석탑,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당간지주, 연못,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건물지 등이 미륵산 아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특히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는 중원(中院)의 목탑은 백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공사를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가 총괄했으며 일본의 첫 불교 사찰 아스카데라(飛鳥寺) 목탑도 백제의 기술자들이 세웠다는 사실을 미뤄볼 때 미륵사 목탑은 백제 건축 기술의 역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물관은 백제 불교 문화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공간 외에도 어린이박물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야외광장, 옥상정원 등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은 상설전시가 열리는 3개 전시실(익산백제실, 미륵사지실, 역사문화실)과 특별전시가 열리는 기획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상설 전시관에는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유물 2만 3000여 점과 인근 왕궁리 유적지 등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불교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백제의 유물 중에서도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영기(봉안기)’는 꼭 관람해보길 권한다. 사리장엄구는 2022년 12월 국보로 승격됐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된 공양물을 일컫는다. 2009년 서탑 해체 중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금제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와 사리호, 청동합 등 총 9점으로 이뤄져 있으며 백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삼국시대 금속공예의 최고 명작으로 꼽힌다. 특히 사리봉영기는 사찰의 창건 목적과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귀중한 자료다. 금판의 앞면과 뒷면에 칼을 이용해 글자를 새기고 획을 따라 주사(朱?)를 입혀 글자를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사리봉영기에는 총 193자의 발원문이 적혀 있다.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은 세기의 러브스토리로 전해지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서동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설화에 따르면 가난한 산골 청년이었던 서동(백제 무왕)은 마를 캐다 팔아 생계를 해결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마를 가지고 신라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먹이고 ‘서동요’를 부르게 했다. 서동이 선화공주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뇌물’로 이용했다는 마는 현재도 금마면의 대표 특산품이다. 국립익산박물관 카페테리아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마 아이스크림을 판매하고 있다. 수많은 왕도가 세워지고 사라졌지만 이곳의 ‘터’가 길러낸 마의 맛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유적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화려한 폐허 속에서 마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면 미륵사지의 빈 땅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무대로 변신한다. 전설이 역사가 된 곳, 미륵사지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강은진 객원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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