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820일의 기록 “돈은 잃었지만 꿈은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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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지옥’ 쓴 최지수 작가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나는 전세사기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2023년 9월까지 경기도에서만 임차인이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이 1조 원을 넘어섰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같은 기간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 보증사고는 1만 3903건, 사고액은 3조 1244억 5742만 원이었다. 통계 속의 피해자는 숫자로 존재하지만 한 명 한 명을 살펴보면 그들은 저마다 다르게 실재한다.
‘전세지옥’을 쓴 1991년생 최지수 씨는 파일럿을 꿈꾸는 사회초년생이었다. 민항기 조종사가 되려면 1억 원가량의 훈련비용이 든다. 11학번이던 작가가 졸업하던 시기는 코로나19로 사회 전체가 멈춰 있었다. 충남 천안시에 있는 외국계 회사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그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회사 기숙사에 살면서 그는 훈련비용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아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는 월세를 아끼려고 발품을 팔았고 전세보증금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에 2020년 생애 첫 대출을 받아 5800만 원의 보증금을 주고 천안시 두정동에 있는 다세대주택에 전셋집을 마련했다.
그 후 그의 생각의 회로는 ‘그때 그 집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에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시간과 계획, 그사이 차곡차곡 모았던 종잣돈과 꿈이 분분히 흩어졌다. 2021년 7월 최 씨의 전셋집은 집주인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갔고 2023년 4월 낙찰된 후 세입자들은 모두 퇴거명령을 받았다. 파일럿을 꿈꾸던 서른두 살 청년, 요리와 캠핑을 좋아하던 여행가, 헝가리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을 꿈꾸던 남자는 그저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다.
다세대주택을 전셋집으로 얻기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당시 네 곳의 부동산에 가서 스무 군데 정도의 집을 봤다. 집을 구한 2020년 7월은 이른바 전세대란이었다. 전셋집은 적은데 구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전세로 나온 매물의 대부분이 대출금이 많은 위험한 물건이었는데도 괜찮다 싶으면 바로 나갔다. 부모님과 공인중개사였던 큰아버지께 문의를 드려 그중에서 신중하게 골랐다. 당시 공인중개사는 “대부분의 입주자가 월세로 살고 있어서 만약 문제가 생겨도 전세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다. 1억 원의 공제증서도 건네줬다.
그런데도 전세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했나?
알고 보니 내가 받은 공제증서는 공인중개사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에만 공제를 받을 수 있었다. 무료 법률상담을 받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건 공인중개사의 과실이 아니었다. 당시 부동산에서는 만약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보증금 1700만 원은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보증금 5000만 원이 넘지 않는 경우에만 해당했다. 나는 800만 원 차이로 받지 못했다. 여전히 궁금하다. 공인중개사는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나에게 29만 원의 복비를 받으려고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집주인을 만나본 적은 있나?
계약서에 써 있던 집주인의 전화번호는 사실 건물 관리사무소장의 번호였다. 집주인을 만난 적도, 통화가 된 적도 없다. 그저 그가 대출이 많다는 것과 나의 보증금이 그의 빚을 갚는 데 쓰였다는 것밖에 모른다.
당시 전세보증금도 일부 대출을 받아 마련했는데.
해외취업 프로그램에 합격한 날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2021년 헝가리로 취업했는데 2022년 7월 전세대출금 2년이 만기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헝가리의 월세와 물가가 올라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헝가리 기업을 퇴사하고 돌아와 카드로 3300만 원을 대출받아 전세대출을 갚았다. 이자와 원금을 포함해 300만 원씩 12번에 걸쳐 상환하기로 했다. 카드빚을 갚기 위해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초밥집에서 일하고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횟집에서 일했다. 그렇게 12시간을 일하고 돌아갈 곳이 사기당한 집이라는 게 괴로웠다.
여자 친구에게는 이런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나의 불행 때문에 타인까지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연애나 결혼은 지금의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친구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는 것도 부담이 되고 지인들과 자전거를 타고 근교에 놀러가는 일상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전세지옥’을 쓰는 과정은 어땠나?
지난 2년 3개월을 다시 돌아본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지옥문이 열리던 그때의 공기와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당시 기록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카카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연재했는데 나도 모르게 부모님이 그 글을 읽었다. 어머니가 “어떻게든 그 돈 갚아줄 테니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연락을 피했는데 계속 돈을 보내주셨다. 나는 당시 이자율 10%의 카드빚을 갚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6%의 이자율로 집담보대출을 받으셨다. 천안을 떠나 부모님이 계신 경기 용인 본가에 들어갔고 덕분에 저녁에 하던 횟집 일은 그만둘 수 있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전세사기 근절을 위한 합동브리핑에 ‘전세지옥’을 들고 나왔다.
처음엔 우물 안에 갇힌 기분이었는데 그 우물 안에서 소리를 지르니까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어주는 느낌이다. 피해확인 절차를 줄이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이야기가 반가웠다. 나도 전세피해확인서를 받기까지 절차가 까다로웠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나처럼 전 재산과 집을 잃었다. 전세피해확인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저리의 대출을 해주면 좋겠다. 집을 잃은 신혼부부나 경제능력이 없는 대학생에게는 주택청약 시 우선권을 주면 어떨까? 전세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극심한 우울감과 자살 충동을 느낀다. 책의 첫 페이지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전세사기 피해자의 명복을 빈다’고 썼다. 전세제도의 맹점이 보완돼 더는 피해자도 희생자도 없길 바란다.
최지수 씨를 만난 건 11월 7일이었다. 사진촬영이 있다기에 가장 단정한 옷을 입었다는 그는 약속시간보다 2시간 먼저 도착해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책이 나온 뒤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때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성실함이 몸에 밴 청년. 한 달이 지나면 그는 여기에 없다. 12월부터 1년 동안 최 씨는 원양어선에 오른다. 만 34세까지만 지원할 수 있는 파일럿 훈련을 받기 위해 돈을 모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는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훈련을 받았다. 입대를 앞둔 것처럼 하루를 쪼개 쓰는 요즘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현실을 알리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쓴다. ‘피해자’로만 남지 않기 위해 그는 작가가 됐다. 그리고 이제는 바다에서 돈을 벌어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이룰 계획이다.
“꿈을 이룰 돈은 잃었지만 꿈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꿈의 항로에서 멀어져 있지만 항로를 수정해서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올 겁니다.”
유슬기 기자
박스기사
전세사기 범죄 근절 대책
윤 대통령 “전세사기, 지구 끝까지 추적하라” 주문
윤석열 대통령이 전세사기 엄벌 의지를 표명하며 “지구 끝까지 추적하라”고 주문한 가운데 법무부와 경찰 등이 강도 높은 단속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관계부처 간 유기적·지속적 협력을 기한 없이 계속해 청년과 서민의 재산을 노리는 전세사기 범죄가 근절될 때까지 엄정하게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먼저 법무부는 범죄에 가담한 공인중개사, 컨설팅업자 등 공범·배후세력도 끝까지 추적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고 다수의 조직적 사기 범행에 대해서는 범죄단체조직죄를 적극 적용해 은닉한 범죄 피해재산 추적으로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을 돕는다.
경찰청 역시 경찰력을 집중해 신속히 수사하는 것은 물론 밝혀진 혐의는 엄정히 사법처리하기로 했다. 범죄첩보 수집 활동도 대폭 강화해 전세사기범의 범행 의지를 선제적으로 차단토록 하고 전국 시·도청에 ’전세사기 범죄수익추적 전담팀’을 편성해 서민들의 재산을 끝까지 찾아내 범죄수익 환수 노력을 강화한다. 국토부는 피해자 관점에서 세심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피해자를 신속히 결정하고 지원방안도 보완해 나가기로 했다.
최지수 씨의 책 ‘전세지옥’를 들고 브리핑장에 들어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 책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며 “기소 후 공판 단계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재판절차진술권을 적극 보장해 피해자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양형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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