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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깎고 다듬고 55년 한길 문화유산 살려내려면 석공 장인 키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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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월대 복원한 임동조 경기도 무형문화재 석장 보유자
10월 15일 100년 만에 복원된 광화문 월대(月臺)가 모습을 드러냈다. 월대는 궁궐 등 주요 건물 앞에 넓게 설치된 기단 형식의 대(臺)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왕과 백성이 소통하는 장소로 쓰였다.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돈화문, 덕수궁 대한문 등에도 설치돼 있지만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1866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 앞에 만든 월대는 길이 48.7m, 폭 29.7m에 달한다. 중앙 부분에는 너비 약 7m의 어도(御道·임금이 지나도록 만든 길)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변형을 거듭했다. 이후 훼손되고 철거돼 도로로 사용됐던 월대가 오랜 복원·정비 사업을 통해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으면서 2006년부터 시작된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도 비로소 마무리됐다.
이날 문화재청은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 월대 및 현판 복원을 기념하는 ‘광화문 월대 새길맞이’ 행사를 열었다. 행사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최응천 문화재청장, 오세훈 서울시장과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 사전 신청한 국민 500명이 함께했다. 기념식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월대를 걸어 광화문으로 경복궁에 입장했다.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는 도열한 수문장과 취타대가, 근정전 앞뜰에서는 도열한 문무백관이 처음 월대를 밟은 입장객을 맞았다.
임동조(68) 경기도 무형문화재 석장 보유자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광화문 월대가 약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는 데는 돌을 깎고 다듬는 석공들의 역할이 컸다. 임 석장은 광화문 월대 복원을 총괄하는 도석수(우두머리 석공)로 복원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임 석장을 포함해 약 30명의 장인이 월대 주변에 울타리처럼 두른 난간석을 배열하고 각종 석조 부재를 완성했다. 임 석장은 자신의 손으로 되살려낸 월대에 올라 광화문으로 향했다. 2010년 복원된 광화문 역시 임 석장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문화재다. 임 석장은 광화문을 지탱하는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해 큰 돌로 만든 구조물) 해체·복원 작업을 맡았다. 이날 복원된 월대를 통해 광화문을 지나는 임 석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경기 포천시의 작업장에서 그날의 소회를 들었다.



월대에 올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작업하면서 고생했던 게 먼저 떠올랐다. 지난 6월부터 9월 말까지 월대 복원 작업에 매달렸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덥지 않았나. 숨 막힐 듯이 더운 날 땀에 젖은 채로 무거운 석재를 옮기고 다듬느라 석공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원형 부재를 다시 활용하다보니 신 부재를 옛 기법으로 가공하고 맞춰 넣어야 해서 애를 많이 썼다. 그래도 광화문 복원 작업에 이어 월대 복원까지 마무리해 기분이 좋았다. 내게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게 감사하기도 하고. 장인이라면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월대를 지나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 근정전까지 걸어가는데 가슴이 벅차오르더라.

작업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복원 작업이라는 게 돌 다듬는 작업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재청이 복원 계획을 세우고 발굴조사를 한 뒤 계획 설계를 하고 공사를 발주한다. 공사를 맡은 회사가 우리 같은 석공을 불러서 석재를 다듬고 쌓는 과정이 4개월 정도 걸린 거다. 다른 작업에 비해 시간도 인력도 많이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을 따지면 복원까지 18년 정도 걸렸다.

이번 복원으로 동구릉에 있던 난간석이 제자리를 찾았다.
1920년대 철거된 뒤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 보관돼 있던 난간석 등 부재 50여 점을 찾아 월대를 복원했다. 당초 문화재청은 동구릉에서 찾은 난간석이 100년 전 월대에 쓰인 원형 부재여서 앞쪽에 모아서 배치하려 했다. 그러나 난간석 뿌리와 모양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19점의 치수가 미세하게 달랐다. 조사를 해보니 광화문 앞에서 월대 끝까지 높이가 30㎝ 정도 차이 났다. 월대 끝으로 갈수록 경사가 낮아지는 구조였다. 광화문 앞에서 광화문광장 쪽으로 내려갈수록 난간석 크기도 1㎝ 낮아졌다. 그렇게 각각의 위치를 특정해 정확한 순번에 놓을 수 있었다. 원형 부재가 딱 맞는 자리를 찾았을 때 쾌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호암미술관에 보관돼 있던 서수상(瑞獸像·상서로운 동물을 형상화한 조각)도 제자리를 찾았다.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 있던 서수상이 월대 끝부분에 있던 장식임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을 때도 ‘월대 장식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석조물을 많이 쌓아보고 올려본 사람만이 느끼는 직감 같은 것이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 유족 측이 기증해 서수상이 제자리에 놓이면서 월대 복원이 더욱 의미있어졌다.

문화재청은 월대 복원 원칙으로 ‘전통 재료·기법을 적용해 진정성 있는 복원’을 강조했다.
동구릉에 있던 원형 부재를 기반으로 새 부재를 가공했다. 100년 전 다듬어진 돌과 차이 나지 않도록 전통 가공 기법을 사용했다. 망치로 정을 두드려 돌을 일일이 다듬었다. 현대식으로 가공하면 질감이나 표면이 다르다. 작업 공정이 까다롭고 500개 가까운 부재를 가공해야 해서 평소보다 인력도 많이 투입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는다면?
100년 전 장인들의 섬세함에 놀랐다. 난간석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 나는 건 경사도를 만들어 배수를 하기 위해서다. 어도에서 양쪽 신하들이 다닌 길로도 물이 자연스레 흐르게 설계했다. 이런 설계뿐 아니라 석구조물을 섬세하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한 솜씨에도 놀랐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뭔가?
무겁고 단단한 돌을 다루는 일이다. 누가 다치거나 오차가 나지 않도록 안전하게 조심스럽게 작업하려고 했다. 나도 예전 작업장에서 돌을 떼내는 과정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더욱이 문화재 복원이라는 게 한번 끝나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다. 신중해야 한다. 정밀하게 실측하고 자료와 부재를 살피고 연구하려고 한다. 올여름은 머릿속이 온통 월대 생각뿐이었다. 머리가 엄청 아팠는데 이렇게 끝내고 나니 시원섭섭하다.

월대 복원 개방 이후 광화문을 찾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뿌듯하고 좋다. 월대가 원래 임금이 백성들과 소통하고 쌀도 나눠주고 격려도 해주던 자리가 아닌가. 국민이 화합하는 자리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소통하길 바란다.

문화유산 수리·복원 분야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15세에 처음 이 일을 시작했다.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석구조물’ 일을 하는 친형과 매형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처음 일한 작업장은 경복궁이었다. 물 떠나르는 일부터 시작해 잡일만 1년 가까이 했다. 겨우 망치와 정으로 돌을 다듬기 시작했고 기술을 배우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하다 보니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 의미 있다 싶었다. 40년 전부터는 아예 문화재 수리·복원에 매진했다.

석구조물은 목조 건축물이 세워지는 초석, 기단, 석축, 육축 등의 기초부를 말한다. 석구조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돌의 강도와 수압, 지압을 고려해야 하고 기하학적 원리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석구조물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나긴 수습 기간을 거쳐야 하고 육체적 고단함도 이겨내야 한다. 오랜 경험과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 한다. 임 석장은 우리나라 석구조물 축조의 전통을 잇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인 중 한 명이다. 임 석장은 2010년 복원된 광화문의 육축을 해체해 복원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조선시대 5대 궁궐 복원 작업 외에도 백제시대 익산 미륵사지석탑 복원에 참여했다. 경복궁 근정전 월대, 덕수궁 대한문 월대 복원도 그의 손을 거쳤다.



50년 넘게 한길을 걸었다.
운명 아닐까(웃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돌을 잘 다듬고 잘 쌓고 어려운 문제도 잘 푼다. 나도 몰랐는데 리더십도 있더라. 여태 일을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안 해봤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수리·복원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던 것 같다. 배운 게 부족해 모르는 게 있으면 혼자 찾아보고 열심히 공부했다. 가공 방법이나 장비, 석재에 대해서도 물어보며 배웠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하다 보니 경험에 의해 노하우도 생겼다. 경희궁 금천교, 창경궁 옥천교를 다 해체해서 다시 쌓으면서 선조 장인들의 기술을 배웠다. 또 일일이 기록하고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완벽하게 작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많은 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고 의미 있는 작업도 할 수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고.
2006년 나주 금성관 복원 공사를 시작으로 경복궁, 덕수궁 등 주요 문화유산 복원 작업을 함께했다. 현장 작업을 지휘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아들이 올해 44세인데 함께 일하는 베테랑 석공들의 평균 나이가 65~70세다. 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일할 사람이 없다. 일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도 없다. 30년 넘게 일을 배우려는 지원자가 없는 상황이다. 도석수로 현장을 지휘할 석장도 3~4명에 불과하다. 석구조물 복원·수리는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아들이 내 뒤를 잇고 있지만 함께 일할 석공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문화재 중엔 석구조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석구조물을 후대에 전하려면 지금이라도 석장을 육성해야 한다.

어깨가 무겁겠다.
건강이 좋지 않아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석장 일을 오래 해서 진폐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 분야의 장인을 육성하는 일이 시급해 아직은 은퇴를 할 수가 없다. 바람이 있다면 작은 직업학교 내지 전통문화교육원을 만들어서 전통기법과 쌓기 공법 등 내 기술과 노하우를 가르치고 싶다. 10년만 가르치면 100명 정도는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책으로라도 기록해둘 생각이다. 정부가 문화재 장인 육성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힘을 써줬으면 좋겠다. 문화재 장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 처우도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문화재 복원이 이뤄지는지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국민도 관심을 갖고 지켜봤으면 좋겠다.

강정미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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