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돕는 것은 우리나라 미래 위한 일 고려인 정착이 지역 소멸 대안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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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러시아의 ‘마마’보다도
카자흐의 ‘아빠’보다도
그루지아의 ‘나나’보다도
고려의 ‘어머니’란 말이
내 정신에 뿌리 더 깊다.
난 고려사람이다.
난 고려인이다.
이 시는 1세대 고려인 시인인 김준의 ‘나는 고려사람이다’라는 작품의 일부분이다. 고려인은 1860년대 연해주로 이동한 조선인들을 시작으로 1937년 당시 소련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수민족 분산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극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조선인들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 현재 고려인은 약 50만 명이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중 대한민국에 거주 등록돼 있는 고려인은 2024년 기준 8만 명에 달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고려인의 지역사회 정착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려인 정착이 지역 인구소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적극적인 지자체로는 충북 제천시가 꼽힌다. 2023년부터 고려인 자녀 맞춤형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지원, 일대일 맞춤형 취업 연계 등 인구소멸 대응을 위해 ‘고려인 이주정착사업’을 진행했다. 재외동포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한국어 교육, 법률 자문단 상담지원, 초·중·고·대학 입학과 전학 상담 지원 등 실질적 정착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도 지속 운영 중이다.
민간 차원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을 꼽을 수 있다. 2018년부터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문화·교육사업을 하고 있는 라 이사장의 고려인 사랑은 남다르다. 그 공로로 올해 우즈베키스탄 북서부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파크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최고 국가훈장인 ‘아르다클리 누호니이’를 받았다. 고려인과 한국사회를 잇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라 이사장을 만나 고려인의 근황과 어려움을 들어봤다.
고려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각별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2014년 당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문화예술분과체육위원장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가 계기였다. ‘고려극장’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1937년에 만들어진 극장이었다. 당시 극장에서 예술전공 학부생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했는데 그때부터 고려인들과 인연이 시작됐다. 평소 소신이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는 스스로 빛난다’인데 이들이 딱 그런 인재들이라고 느꼈다. 이후 카자흐스탄 알마티 소재의 ‘중앙아시아 통일과 나눔 아카데미(2018)’, ‘우즈베키스탄 통일과 나눔 아카데미(2022)’를 설립해 한글·전통문화 교육 등 대한민국을 알릴 수 있는 문화사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2018년부터 의료지원 및 의료봉사 활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봉사활동을 시작했을 때 고려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고려인 사회에서 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반대였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의아하고 당혹스러웠다. 내게 한 고려인은 “돌아가라”며 냉대하기도 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몇몇 단체가 고려인들 지원사업을 한다며 약간의 금전을 지급하고 사진만 찍고 가는 일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상처받은 고려인들이 나 역시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마음을 돌렸나?
먼저 우리나라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후에는 금융교육, 취업알선, 의료지원 사업까지 점차 확대해나가니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의료지원 사업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한국의 의사들이 진료해준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이 몰려왔다. 현지 언론도 조금씩 우리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자연스레 고려인들도 우리의 진심을 믿어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를 꼽는다면?
2019년 7월에 완공된 ‘우슈토베 추모비 건립 사업’과 2020년 12월에 진행된 ‘한·카자흐스탄 우호기념비 제막식 행사’다. 우슈토베는 카자흐스탄의 지역 이름이자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이기도 하다. 또 많은 고려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곳인 만큼 이곳에 고려인 추모비, 고려인 항일독립운동가 추모벽, 한·카자흐스탄 우호비를 건립해 양국 간 우호를 다지고 고려인을 추모하고자 했다. 현재는 해당 공간이 ‘한·카자흐스탄 우호공원’으로 조성돼 있는데 향후에는 역사유적지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지난 6월 카라칼파크와 교육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카라칼파크란 나라는 낯설다.
카라칼파크는 우즈베키스탄의 자치공화국이다. 우즈베키스탄 면적의 약 37%에 해당되고 인구는 2022년 기준 200만 명이 조금 넘는 자치국인데 이곳에도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들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정체성은 조선의 후손이 맞다고 느꼈다. 카라칼파크에서 고려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애정이 더 커졌다.
카라칼파크에서도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앞으로 카라칼파크의 수도 누쿠스에 ‘세종학당’을 만들 계획이다. 카라칼파크 국민과 현지 고려인들의 식습관과 생활문화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과 비슷하다. 특히 고려인들의 삶은 우리나라의 1960년대와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가장 신기했던 점은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교육열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의도 굉장하다. 현재는 이들 중 우수한 젊은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국내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취업까지 돕는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고려인 인재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게 목적인가?
물론이다. 이미 지난 7월에 한국어로 일상생활이 가능한 카라칼파크 학생 32명이 국내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카라칼파크 정부는 현지 학생(특히 고려인)들의 한국 대학 진학을 공식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비자 발급, 금융 지원, 입학 보증 등 전 과정에서 협력하기로 했고 우리가 담당하는 부분은 학생 모집부터 국내 취업까지 전 과정이다. 앞으로 매년 500명의 학생을 데려올 예정이다.
고려인 인재가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고려인에게는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한 양질의 인재를 확보한다는 목표도 있다. 또 아직은 미약할 수 있어도 대한민국의 인구절벽을 고려인과 함께 대비해보자는 부분도 있다. 그들의 뿌리가 우리와 같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 않나. 그들이야 말로 대한민국이 존중하고 인정해야 할 존재들 중 하나라 생각한다. 고려인들이 훗날 한국사회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사회에 잘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선친이 독립운동가 출신이라고. 선친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백봉 라용균이 선친이다.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을 만큼 우직한 성격이었다. 또 3·1운동의 선구인 2·8독립선언 사건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르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항상 아버지는 “사람을 대할 때 신사적인 면모를 보이면 상대방도 신사가 된다”고 했다. 나 역시 고려인들을 대할 때 도와야 할 사람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 아버지가 부와 권력을 배제하고 애국애민 정신을 몸소 실천했듯 나 역시 고려인들을 신사적으로 이끌고 싶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애국애민정신은 뭔가?
남을 도울 수 있어야 그만큼 우리도 성장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타인과 타 국가를 돕는 일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자 ‘국위선양’으로 직결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경제대국이지만 이에 걸맞은 사고와 철학을 가졌는지 대해서는 현시점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영향력이 커진 만큼 그 영향력을 선하게 활용하는 이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고려인을 계속 돕게 만드는 동력은 뭔가?
대한민국이 가진 소프트파워가 어디든 안전하게 착륙하기를 바라고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우리 국민의 정서 속 이타심을 잃지 않는 것이 개인의 행복, 국가의 발전을 가져오는 길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진국민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눈동자를 보는 것에서 무한한 감동을 느낀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이다. 내년에도 직접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해 고려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공부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고려인들이 한국에 안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백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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