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편성표와 밥 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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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질문에 몇 주를 곱씹으며 웃었다.
“이슬이 너 혹시 대하드라마 팀에서 일해? 150부 작이야? 언제쯤 방송 나와? 아니 너 일하고 있는 건 맞지?”
매주 시청률 성적표를 받는 예능 팀 작가로 몇 년을 일하다 드라마 팀으로 옮긴 지 2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만든 작품이 ‘온에어’ 되는 날을 가늠할 수조차 없어 답답하던 차에 들은 농담이었다.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난 다른 드라마 작가들의 상황도 팍팍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중 누군가 번호 하나를 알려주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바닥에서 유명한 전화 타로 집이야. 편성이나 캐스팅 고민될 때 전화하면 기가 막히게 답을 준대. 속는 셈 치고 한 번 전화해봐.” 내 성격상 전화할 일은 없었지만 저항 없이 전화번호를 받아적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강렬한 유혹에 시달렸다. 용하다는데 손해 볼 것도 없으니 한 번 전화해볼까?
그렇게 망설이고 있자니 불현듯 20대에 봤던 사주풀이가 떠올랐다. 철학관 아저씨는 내가 “106세 되는 해에 관운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설마 그 관운이라는 게 우리 드라마 아닐까? 그 얘기를 농담 삼아 했더니 메인 작가님은 해탈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때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 뒤를 잘 부탁한다”고. 이렇게 회의실엔 슬픈 자조가 섞인 이상한 유머가 끊이질 않는다.
맨 처음 드라마 팀으로 옮길 때 작가 선배가 했던 말이 자주 떠오른다. “예능은 결과물이 바로바로 나오잖아. 그런데 드라마는 짧아야 1년이고 길어지면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오래 걸려서 힘들 거야.” 그때는 잘 몰랐지만 요즘은 그게 무슨 말인지 피부로 느낀다. 편성은 곧 손에 잡힐 것처럼 아른거리지만 실제로는 없는 오아시스 같기도, 아주 없을 것 같은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해리포터의 ‘9와 4분의 3 승강장’ 같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성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일에 목이 마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라도 했을 것이다. 매달 일한 만큼 월급이라도 꽂힐 것이 아닌가(계약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드라마 작가는 편성 후에 잔금을 받는 경우가 많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니 뭘 하고 있긴 한 건지 헷갈릴 때면 싱크대 장을 열어 칼을 꺼내 쥔다. 당근이든 파든, 하여튼 냉장고에 있는 뭐라도 꺼내어 썬다. 잠시 후면 그것이 보글보글 끓는 찌개가 되거나 며칠을 두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이 된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요리를 먹으며 스스로를 칭찬한다. ‘내가 이렇게 잘 만들었구나, 내가 나를 먹여 살리는구나’ 하고. 그 작고 일상적인 행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만족감을 준다. 매일매일 밥을 지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자기효능감이라고. 자기효능감에 포만해진 나는 손 놓고 막막해하는 대신 정면돌파를 각오하며 다시 두 팔을 걷어붙인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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