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 난 도마 갈고 고장 난 물건 ‘뚝딱뚝딱’ 환경도 지키고 마음의 여유도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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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수리 카페 ‘수리상점 곰손’
손가락 까딱 한 번으로 고장 난 물건을 대신할 새 제품을 살 수 있는 시대, 수리란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골치 아픈 일로 전락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 2024년 초 문을 연 셀프 수리상점 ‘곰손’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곰손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문화에 맞서 끝까지 아껴 쓰고 서로를 돌보는 문화를 지향한다. 찢어진 우산, 깨진 그릇, 구멍 난 옷은 물론 배터리 수명이 다한 휴대전화까지 곰손을 거치면 새 생명을 얻는다. 매주 다른 주제로 열리는 워크숍에 참여하면 재봉틀·바느질, 칼·가위 가는 법, 음식물쓰레기 퇴비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다.
손재주 없는 ‘곰손’들도 걱정할 필요 없다. 5000원만 내면 곰손지기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공구를 이용해 자유롭게 물건을 고칠 수 있다. 수리도 식후경, 곰손 안 카페에 비치된 식기를 이용해 망원시장에서 음식을 사와 먹는 것도 가능하다. 단 종이컵, 비닐봉투 등 1회용품은 쓸 수 없고 사온 음식물은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곰손은 여섯 명의 ‘곰손지기’가 공동으로 운영한다. 영화감독, 환경운동가 등 나이도, 이력도, 사는 곳도 모두 다른 이들이 곰손을 연 이유는 무엇일까? 한쪽 바닥 면에 곰팡이가 펴서 버려뒀던 도마를 챙겨 수리상점 곰손의 문을 두드렸다.
전동드릴, 망치부터 시계 수리용품까지
곰손 입구에 동그란 스티커가 붙은 작은 브라운관 TV가 있다. 스티커에 적힌 ‘곰손이라도 괜찮아’라는 글귀가 마음의 문턱을 확 낮춰준다. ‘곰손’은 손재주가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 옆으로 고장 난 우산 천으로 만든 파우치, 폐비닐 북커버, 자투리 가죽을 활용한 문구 보관함 등이 있다. 전동드릴, 줄자, 드라이버, 나사, 망치 등 수리에 필요한 공구도 가득하다.
이날 곰손을 지키는 곰손지기는 박성연(활동명 성연, 57) 대표였다. 곰손지기들은 각각 전자제품 수리, 재봉틀 등 다양한 분야의 워크숍을 진행하며 참여자들에게 수리 노하우를 전한다. 박 대표는 도마나 나무 그릇 등 목재를 활용한 제품 수리에 도움을 준다. 허브를 재배하고 오일을 활용해 방향제나 비누 등을 만든 이력을 살려 아로마 워크숍도 연다.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모기 기피 모빌 만들기 워크숍이 인기다.
박 대표에게 망가진 도마를 내밀었다. 꼼꼼히 도마를 살핀 그는 “곰팡이가 꽤 깊은 곳까지 번져 목공소에 가져가서 그라인더로 많이 갈아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곰팡이가 핀 곳을 갈아낸 이후의 도마 관리법에 대해선 직접 사포로 도마 표면을 갈며 설명했다. 그는 “칼자국이 난 곳은 사포로 갈고 생(生)들기름이나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를 마른행주에 묻혀 코팅을 자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관리법을 배우고 직접 기름을 묻힌 행주로 도마를 닦았다. 사포로 한 번 갈아낸 상태라 그런지 도마 표면이 매끄러워 행주가 부드럽게 밀렸다. 들기름 냄새도 좋았다. 모든 과정이 마치 명상을 하는 기분이었다. 박 대표는 “수리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라며 “수리를 마치면 다들 굉장히 행복해하고 물건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고 전했다.
재활용에 앞서 ‘버리지 않고 고치는 문화’를!
기자가 방문한 날도 박 대표는 집에서 오래된 선풍기를 가지고 와서 먼지를 제거하고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도 처음부터 수리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에 참여했다가 현재의 곰손지기들을 만난 게 시작이었다.
박 대표는 “곰손지기들과 물건을 고쳐 오래 쓰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리페어 컬처(Repair Culture)’라는 책을 읽고 ‘재활용 이전에 물건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의기투합해 공간을 빌리고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수리상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수리 방법을 알려주는 정보는 많은데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리를 위해 도구를 사고 실패 위험을 감수하느니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고치는 것보다 새것을 사는 게 더 쌀 때도 있다. 수리 대신 소비를 권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진 것 같다.
비용보다 시간이 문제일 때도 많다.
맞다. 바쁘면 수리를 할 수가 없다. 바쁜 일상에도 빈 공간이 있어야 수리하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다. 방문한 사람들도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워크숍은 어떤 건가?
깨진 그릇 수리, 스마트폰 배터리 교체 워크숍이다. 옷 수선 워크숍도 참여자가 많다. 대부분 간직하고 싶은 물건을 지키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좌다. 해외여행 때 산 접시가 깨져서 안타까워 들고 오기도 하고 정말 오래된 스마트폰이라 작동은 할까 싶은 것들도 갖고 온다. 그들을 보면서 삶의 자세 등을 많이 배운다.
곰손지기들이 워크숍을 다 진행하나?
기본적으로는 곰손지기들이 하고 전문가를 섭외하기도 한다. 배터리 교체는 전문과정을 곰손지기 네 명이 배워서 진행하고 있다. 우산 수리는 장인을 모시기도 한다. 우산은 특히 ‘호우호우’라는 수리팀이 따로 있어 전국 각지에서 고장 난 것들을 수거하거나 개별적으로 의뢰받아 고쳐준다. 개당 수리 가격은 5000원이다. 수리가 불가능한 우산은 분해해 다른 우산을 수리하는 부품으로 다시 쓴다.
글로벌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2016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스마트폰이 배출하는 전체 탄소배출량 중 79~85%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밝혔다. 스마트폰을 새로 사지 않고 계속 쓰는 것만으로도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스마트폰 배터리의 수명은 2~3년 정도다. 스마트폰이 고쳐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배터리만 갈아줘도 그 기간만큼 더 쓸 수 있다. 곰손에선 스마트폰처럼 고가의 물품 외에도 조금만 손보면 다시 쓸 수 있는 전자제품을 살리는 캠페인도 진행한다. 해지거나 찢어진 헤드셋 커버 교체 방법이나 지저분해진 이어폰을 청소하는 팁 등을 영상으로 만들어 알리고 있다.
사연 있는 물건도 많겠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물건들이 있나?
50대 방문객들이 결혼할 때 산 전자제품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선풍기, 믹서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20~30년을 쓴 셈이다. 외국 물건 중에는 우리랑 전압이 다른 제품들도 있는데 플러그를 바꿔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묻기도 한다.
여기서 못 고치는 제품은 어떻게 하나?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건 아니다 보니 못 고치는 제품은 근처 전파사에 도움을 청한다. 요즘은 전파사라고 해도 전기공사를 하거나 전자제품만 파는 경우가 많은데 진짜 수리를 하는 곳도 있다. 얼마 전에도 전기장판을 가지고 가서 고쳤다.
몇 십 년 된 물건도 고치면 쓸 만한가?
20년 전쯤 공기 순환을 돕는 ‘서큘레이터’라는 제품이 처음 나올 때 비싼 값을 주고 구입했다. 몇 년 전 분해 청소를 하려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판매 회사에 전화했는데 구형 모델이라 그냥 버리라고 하더라. 아쉬워서 가지고 있다가 환경 관련 행사에서 분해·청소해 아직도 잘 사용 중이다. 옛날 물건들은 구조나 원리가 단순해서 오히려 고장이 잘 안 난다. 동네 붕어빵 가게 사장님도 아직 브라운관TV를 보는데 화질이 괜찮더라.
새 물건을 사야 할 때는 어떻게 하나?
새 물건이 필요할 때가 분명 있긴 하다. 그럴 땐 여러 번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필요가 없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더라. 아이폰11 스마트폰을 쓰는데 인공지능(AI) 기능이 탑재된 제품이 나와서 관심이 가긴 한다(웃음).
수리 문화 정착을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수리권을 보장하는 제도와 사회적 기반이 절실하다. 현재도 물건을 제조 및 수입하는 업체는 수리 부품을 3년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 있지만 적용 범위가 지속가능한 제품으로 한정돼 있어 확대가 필요하다. 프랑스처럼 수리·수선 지원금 제도를 만들어서 물건을 수리할 때 일정 금액을 정부가 지원해주는 방안도 가치가 있다. 리페어 카페 형태의 공간을 많이 만들어 수리 도구나 장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사람들끼리 수리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을 늘리는 것도 수리 문화 정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곰손도 열심히 하고 있다.
상점 한쪽에 인도의 정치인 간디의 글이 쓰여있었다. ‘당신이 세상에서 보기를 바라는 변화가 있다면 스스로 그 변화가 돼야 한다’. 기후위기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곰손이 그 답을 말해주는 듯했다. 말끔해진 도마를 들고 오는 길, 그 변화를 위한 가치있는 한 걸음을 뗀 것 같았다.
고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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