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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보다 남친 원하는 외할머니에게 뜨거운 여름 선물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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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 1등 ‘첫여름’ 허가영 감독
“한마디로 ‘이상한 할머니’였다.”
허가영 감독은 학창 시절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떠올렸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딸을 두고도 밥상을 차려주기는커녕 늘 거울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어린 시절 허 감독의 눈에 할머니는 일반적인 할머니와는 거리가 먼 독특한 인물이었다.
할머니를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다. 노인학 수업을 들으며 난생처음 할머니와 여섯 시간 가까이 둘만의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지내시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놨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놈이 연락이 안돼. 요샌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와.”
70대 여성과 20대인 자신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중매체 속 익숙한 할머니의 역할을 기대한 건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었단 걸 그제야 깨달았다.
허 감독의 영화 ‘첫여름’은 70대 노인 ‘영순’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손녀딸의 결혼식 대신 남자친구 학수의 49재에 가고 싶은 그녀’. 한 줄의 로그라인만으로도 강렬한 호기심을 부르는 이 작품은 5월 22일 열린 제78회 칸영화제에서 라 시네프 부문 1등을 차지했다. 전 세계 영화아카데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부문에서 우리나라 감독이 1등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 감독은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2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겨준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 제목 ‘첫여름’엔 뒤늦게 자신의 욕망을 좇는 할머니에게 그가 선물하고픈 ‘인생의 첫 뜨거움’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할머니의 삶이 영화의 모티프가 됐다고.
고등학생 때 집안 사정으로 6개월간 할머니와 단둘이 지냈다. 할머니는 매일 마스크팩을 하면서도 나에겐 한 장도 주지 않았다. 혼자 라면 끓여먹고 바퀴벌레 잡으면서 서러워 눈물이 났다. 엄마와 싸웠다고 “내 딸 괴롭히는 사람은 손녀라도 용서 못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늘 할머니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의 긴 대화가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할아버지와는 어떻게 결혼했고, 지금의 남자친구는 어떻게 만났고, 매일 어딜 다니시는지 등에 관한 대화였다. 처음으로 노인의 욕망을 보게 된 날로 기억한다.

흔히 노인은 젊은이와 전혀 다른 욕망을 갖고 있거나 아예 욕망이 없는 존재로 오해되곤 한다.
대학에서 노인 관련 수업을 들은 이유가 노인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의 세상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남자친구와 연락이 안돼 잠을 못 잔다니 내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 게 아닌가? 할머니는 젊은 시절 팔려가듯 결혼해 평생 고생만 하며 살았다고 했다. 자식들 다 키우고 나서야 여유가 생겼는데 이젠 만나줄 친구가 없더란다. 매일 화장하고 외출하는 이유가 ‘어디 말동무 없나’ 하면서 반찬가게 등을 기웃거린 거였다. 춤추는 걸 워낙 좋아했는데 그것도 70대가 돼서야 맘 편히 하게 됐단다. 이제라도 가족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중심에 둔 삶을 사는 게 너무 멋져 보였다. 진짜 이상하지만 어쩌면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일 수도 있는 그의 삶을 영화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영화엔 남편의 병수발을 들다 남자친구 연락에 설레거나 성관계를 암시하는 장면 등 다소 민감한 신도 등장한다. 노년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프랑스 관객의 반응은 무척 뜨거웠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용기를 얻었다”, “내 삶이 내 것이란 걸 알려줘서 고맙다”며 직접 찾아와 소감을 말해주기도 했다. 평생 자식 뒷바라지하고 늙어선 남편 병수발하며 늦게나마 자신의 삶을 찾아나선 여성의 드라마가 한국적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전 세계 여성의 보편적인 현실이었던 거다. 로맨스가 핵심 주제는 아니지만 주인공의 애인 ‘학수’를 보며 해방감을 느꼈다는 한국 남성 관객들의 반응도 재미있었다(웃음). “이 영화를 보고 노인이 되는 게 두렵지 않아졌다”는 젊은 관객들의 리뷰도 참 귀하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대신해 허 감독의 취재원이 돼준 이들은 ‘캬바레’에서 만난 노인들이었다. “20대 여성이 말하는 70대 여성의 이야기가 가짜처럼 보일 수 있다”, “노인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주변의 우려는 감독 스스로도 느끼는 불안이었다. 때마침 죽음, 안락사 등을 소재로 한 노인 영화가 쏟아지는 것 또한 트렌드를 좇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 스태프들과 함께 방문한 캬바레에서 노인들의 진짜 이야기를 만났다. 허 감독은 “20대 청년들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이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저녁 6시 전까지 신나게 놀고 이후엔 밥하러 집에 간다”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춤추는 걸 좋아하는 영순이 학수를 처음 만나는 곳이 캬바레다. 취재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캬바레는 영순이 빼앗긴 욕망을 되찾는 장소다. 젊은 사람이 왜 이런 델 오냐며 내쫓긴 적도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준 분도 많았다. 캬바레에 오는 연령대는 50~90대까지 다양한데 다들 열정이 엄청났다. 한 번에 5시간 넘게 춤을 춘다는 어르신도 많았다. 사람들은 노인의 춤을 ‘춤바람’으로 폄하하지만 이들에게 춤은 운동에 가까워 보였다. 어떻게 춤을 배웠고 이곳에서 연애는 어떻게 시작하는지, 삶의 낙은 뭔지 등을 물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면 직진한다는 사람도, 천천히 다가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이들의 연애 방식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성생활을 즐기는 이들도 많았다. 내가 본 노인들은 이제라도 자신의 욕망을 되찾으려는 뜨거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영화가 다큐는 아니지만 노인의 삶을 그리는 데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처음엔 손녀 시점에서 영순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썼는데 자꾸만 ‘빈칸’이 느껴졌다. 어느 날 꿈에 할머니가 나와 꾸중을 하셨다. 그때 알았다. ‘아, 내가 영순이 되기 싫어서, 진짜 노인이 되는 것 같아서 자꾸만 회피하고 있었구나.’ 시나리오를 주인공 시점으로 전부 뜯어고쳤다. 그때부터 노인이라는 한 단어로 납작하게 존재했던 이들의 얼굴이, 이름이, 삶이 각각의 이야기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영화 속 대사도 실제 노인들의 말을 빌려온 것이 많다고.
“난 이승친구보다 저승친구가 많아”, “음악소리만 나오면 막 춤추고 싶어. 성미가 그래” 같은 대사들이다. 노인들은 “곧 나도 죽고 너도 죽을 건데” 같은 해학적인 표현을 많이 한다. 생의 열망과 체념이 동시에 담긴 절묘한 말이다. 영순을 연기한 허진 배우도 대사를 쓰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원래 시나리오엔 영순이 학수의 49재가 열리는 절의 계단을 올라가는 신이 있었는데 노인들은 그렇게 높은 계단을 못 올라간다는 허 배우의 말에 장면을 바꿨다(웃음).

허 감독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첫여름’은 그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작품이자 네 번째 영화다. 대학 동아리에서 취미 수준으로 만든 두 편을 포함해 불과 세 편의 영화 제작 경험을 토대로 칸영화제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KAFA 입학을 앞두고 “5년만 영화를 하게 해달라”며 부모에게 허락을 구한 것이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학창시절부터 소설, 시, 수필을 끊임없이 써온 것이 동력이 됐다”는 게 허 감독의 겸손한 해명이다.
그는 앞으로도 영순과 같이 세상이 주목하지 않은 이들의 서사를 들춰보는 일이 감독으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정의했다. 대학 시절 빈곤, 노동, 환경 관련 시민단체 활동과 연구 경험이 그의 필모그래피가 돼줄 차례다.

영화계에 제대로 뛰어든 지 고작 2년 차, 벌써부터 차기작에 관심이 쏠린다.
거대한 이야기보다 개인의 서사에 관심이 많다. 특히 소수자,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50대 여성 베이시스트, 정육점에서 불법 피임약을 파는 여성의 이야기를 첫 장편 주제로 생각하고 있다.

많은 관객이 관심 가질 만한 소재는 아닌데.
영화를 만든다는 건 엄청난 힘이다. 특히 감독은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 하나하나를 위해 수많은 스태프의 노동력을 활용한다. 관객 입장에선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를 두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보는 거다. 그러니 영화는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해야 하고 그 가치는 ‘질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불편하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주목하지 않으면 소수의 삶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수의 이야기, 세상에 꼭 필요한 이야기인 것들을. 불편한 소재도 재밌게 만들면 된다.

‘첫여름’이 그걸 증명해준 것 같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영화를 봤다면 어떤 말을 해줬을까?
영순이 결혼을 앞둔 손녀딸에게 속옷 선물을 건네며 “남자는 자고로 너 즐겁게 해주는 남자가 최고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았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색함을 풀진 못했다. 그럼에도 분명 내 삶을, 영화를 지지해줬을 거라고 믿는다.

영순이 방 안에서 홀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학수의 49재가 열린 절 앞마당에서 그녀가 다시 춤사위를 펼치다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널며 끝을 맺는다. 허 감독은 ‘비로소 여성 해방’이라는 해피엔딩 대신 지극히도 현실적인 담담한 마무리를 택했다. 노인의 삶을 전시하거나 미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렇게 영화는 욕망을 좇되 결국은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첫여름’은 1996년생 허 감독이 1937년생 외할머니 이영희 씨에게 배운 삶의 진짜 모습이다.

조윤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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