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막막하다면 역사 공부를 “불확실성의 시대, 역사가 백미러 돼줄 것”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본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대사 최태성 별별한국사연구소장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돌림노래로 읊어대고 이순신 장군과 유관순 열사의 위인전을 닳도록 읽던 어린 시절에는 역사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같았다. 그러다 중고교 시절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의 연혁과 조선왕조의 업적, 삼국시대의 통일 과정 따위를 줄줄 외우다 보면 역사는 마음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미래가 불확실성으로 희미할 때, 세상이 대체 왜 이렇게 돌아가나 싶을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표를 마주했을 때 다시 역사책을 들춰본다. 삶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선 지나온 길을 돌아보듯.
최태성 별별한국사연구소장은 “어느 때보다 삶이 불확실한 이 시대에 우리에겐 역사라는 백미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 소장은 최고의 영향력을 구가하는 한국사 커뮤니케이터다. 지난 30년간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EBS 한국사 강사로, TV 역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대중에게 우리 역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 힘써왔다. 누적 수강생 700만 명. ‘스타 역사 강사’로 불리지만 여태껏 무료 강의만 고집해왔다. 누구나 역사를 손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에서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만난 최 소장은 시험 치를 일 없는 어른도 계속 역사를 공부해야 할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갈수록 우리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 와중에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가야 할 길을 잘 찾을 거예요. 100년 전, 1000년 전 과거를 통해 무수히 많은 선택과 그 결과를 확인했으니까요. 역사는 현 시대의 맥을 짚는 데 가장 유용한 무기예요.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답을 찾고 싶다면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최 소장은 2024년부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국유단은 2000년부터 6·25전쟁 전사자들의 유해를 찾아 가족의 품에 전달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는 총 1만 3383구(2024년 12월 기준). 한국군과 유엔군 전사자 17만여 명 중 여전히 12만 명의 시신이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있다. 최 소장은 국유단의 사업은 “역사의 빚을 갚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라”는 것은 평소 그가 강조해온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애써 고개 돌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이유는 무엇인가. 마주앉은 최 소장에게 물었다. 때마침 38년 전 6·10민주항쟁의 함성이 전국에 울려퍼지던 날이었다.
국유단의 유해발굴은 어떻게 이뤄지나?
6·25전쟁 당시 대형 전투 기록, 전사자 기록 등을 토대로 유해가 있을 법한 곳을 찾는 것이 먼저다. 유해가 있다면 총 등의 무기가 함께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금속탐지기가 동원된다. 금속 단추 같은 유품이 발견되면 본격적으로 국유단이 투입된다. 지난달엔 1951년 5월 국군 2·6사단과 미 7·24사단이 중공군에 맞서 싸운 경기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 329고지 일대에 방문했는데 온몸의 뼈가 온전한 채로 옆으로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의 유해가 발견됐다.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 상상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유해를 찾더라도 신원을 밝히기 쉽지 않다고.
전쟁 당시 많은 국군이 군번과 인식표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때문에 유해와 대조할 유전자가 있어야만 신원을 밝힐 수 있다. 유가족의 관심이 절실한 이유다. 거주 지역 보건소나 보훈병원, 군병원에 가면 유전자 시료 채취를 신청할 수 있다. 전사자의 친·외가 8촌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 이러한 사업이 있는 줄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유해발굴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수습하는 것은 전쟁 직후 이뤄졌어야 했는데 우리는 6·25전쟁 이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그 일을 시작했다. 이제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12만 명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도리다. 국가가 나를 책임져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국민도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유해발굴 사업은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과 같다.
국유단의 활동은 역사를 되새기는 일이다. 우리는 역사를 왜 알아야 하나, 근본적인 질문을 품게 된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누군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키고자 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처럼 내 삶이 역사에 빚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미국 한인 이민자 중 최초로 주 대법원장에 오른 문대양 선생은 돌아가시기 1년 전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삶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세상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거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역사에 진 빚을 갚으며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당장 취업과 내 집 마련의 어려움 등에 직면한 젊은 세대에겐 너무 먼 얘기일 수 있다.
역사 속에도 취업난은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처음 만난 게 한인 노동자들인데 그들은 일자리를 못 구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도산 선생은 학업을 포기하고 직업소개소를 차렸다. 그러면서 “오렌지 하나도 정성껏 따는 것이 애국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실제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다른나라에 와 성실히 일했기 때문에 뒤따라온 사람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일자리를 얻고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도 더욱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역사에 진 빚을 갚는 삶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 오렌지 하나도 정성스럽게 따듯이 인생의 건강한 의미 하나만 쥐고 살면 된다는 거다.
태도에 관한 얘기로 들린다. 취업난, 빈부격차 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방안도 역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나?
우리나라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린다. 인육을 먹을 만큼 팍팍한 삶을 살던 민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세상이 달라지게 해달라고 빌거나 죽창을 들고 봉기하는 것밖엔 없었다. 신분제 철폐를 목표로 일어난 갑신정변도 3일 천하로 끝났다. 요즘으로 치면 20대 젊은이들이 개혁을 꾀한 건데 당시 사회의 여론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투표라는 엄청난 권력이 있지 않나. 이건 앞선 실패를 토대로 끊임없이 현실을 바꾸고자 했던 선조들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다. 취업이 안 된다고, 돈이 없다고 사회만 탓하고 있을 순 없다. 사회구조가 문제라면 투표를 통해서든 연대를 통해서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도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에겐 현실을 스스로 바꿔낸 민중의 역사가 있다. 역사를 알면 지금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다.
새 정부 출범으로 6·10민주항쟁의 의미도 남다르게 읽힌다.
6·10민주항쟁을 통해 국민이 쟁취한 투표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잘못 뽑은 권력으로 인해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굉장히 취약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도 투표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라는 거다. 선거 때마다 뽑을 사람이 없다고? 그건 제대로 된 일꾼을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의 탓도 있다. 힘겹게 쟁취한 국민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고 누리는 데도 훈련이 필요하다.
역사의 쓸모로서 인생의 멘토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자주 거론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말이 “선생님처럼 살고 싶어요”다. 나조차 나를 못 믿는데 누군가 나를 맹신하면 겁부터 난다. 그런데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검증이 끝났다. 사고칠 일 없으니 충분히 멘토로 삼을 만하다. 내 인생의 멘토는 이석영 선생이다. 그는 지금 시세로 3조 원에 이르는 재산을 가진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런데 그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 하는 데 다 바치고 정작 자신은 돈이 없어 굶어 죽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는 수년 전 사교육 업체로부터 거액의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때다. 그때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무료 강의를 고수할 수 있는 건 온전히 이석영 선생이 보여준 삶 덕분이다.
공부법도 중요하다. 어려운 역사,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배울 수 있나?
고등학생 시절 유독 역사만 성적이 잘 나왔다. 공부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던 건데 선생이 야사를 많이 들려준 덕이다(웃음). 야사를 요즘 말로 하면 뒷담화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과 관련된 것이 가장 재미있지 않나.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상상의 대화를 해보고 그들을 멘토로 삼는 건 역사를 재미있게 배우는 동시에 내 삶 가까이 끌어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구체적으로는 영화나 책을 통해 한 인물의 전기로 역사를 배우는 것을 추천한다.
여전히 학교에선 시험을 전제로 한 암기 위주의 교육이 진행 중인데.
궁극적으론 절대평가로 가야 한다. 상대평가하에서 변별력을 높이려고 하다 보니 시험이 자꾸 어려워지고 그러면 학생들은 공부로 재미를 못 느낀다. 다만 당장 제도를 바꾸긴 어렵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느낀 감정만 잊지 않으면 된다. 역사적 지식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다. 가령 을사오적을 공부할 때 분노를 느꼈다면 그 기분을 기억해뒀다 사회에 나가 중요한 선택을 하거나 책임을 져야 할 때 떠올리면 되는 거다.
평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라”는 말도 강조했다.
너무 거창하게 말하는 게 역사학자의 고질병이다(웃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라는 말을 쉽게 풀면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눠주자는 거다. 오늘 마주친 사람에게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비를 맞고 있는 사람과 우산을 나눠 쓰는 사소한 일이 모두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증오와 혐오로부터 해방이다. 해결책은 어렵지 않다. 앞서 말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분노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거다.
역사 커뮤니케이터로서 하고 싶은 일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과 같은 역할이다. ‘유사(遺事)’라는 건 버려진 것들을 모은 역사란 뜻이다. 당시 선택 받은 것은 정사인 ‘삼국사기’고 버려질 뻔했던 고려시대 역사의 뒷이야기를 꺼내와 기록한 것이 ‘삼국유사’다. 나 역시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 없는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는 일을 하고 싶다. “이것 봐, 휴지 조각인 줄 알았는데 보물이지? 역사가 그런 거야!” 하고.
조윤 기자
[자료제공 :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