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제주 용머리해안서 맛본 고사리해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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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 봄!
유채와 벚꽃이 절정인 제주에 가고 싶어, 또 엉덩이가 들썩인다.
봄처럼 싱그러웠다가 한여름같이 그늘 드리우며 푸르렀던 사람, 가을처럼 아름답다가 종래 겨울같이 포근했던 '애순'과 '관식'이 지금도 제주 바당에 있을 것 같아서 이번 제주를 향하는 하늘길은 왠지 더 꽁냥거렸다.
방송작가라는 직업 덕에 전국 어지간한 곳을 많이 다니긴 했지만, 제주만큼은 특별하다 못해 굉장히 비밀스럽도록 소중하다.
처음엔 이국적인 에메랄드빛 바다에 반했고 다음은 산인 듯 언덕인 듯 나지막한 '오름'에 반한 나는 아이가 어릴 때 제주서 한 달 살아보기도 했다.
오전엔 용눈이오름, 백약이오름, 금오름, 새별오름 등 오름을 전전하고 한낮에는 계곡서 발 담근 채 책 읽거나 곶자왈을 거닐고,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가신 오후에는 하도나 세화 바다에 몸 담그던, 조금 젊은 시절의 요망한 계집 '애순' 같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관광객들이 몰려들던 제주이건만 지금은 죄다 일본, 중국, 베트남 등 해외여행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빠지는 터라 제주 인기는 전만 같지 않다.
워낙 대표적인 국내 관광지라 높은 물가를 비롯해 몇 가지 발목을 잡는 이슈가 있긴 하지만 국내 여행 1번지 제주는 여전히 이름값을 하는 매력적인 땅이다.
특히 십 년 만에 다시 다녀온 '용머리해안'은 유일하게 로컬100에 이름올린 제주의 유산으로서 제주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직 제주 사람 중에도 그 가치를 몰라서, 혹은 시간이 맞지 않아서 가본 사람이 많다는 용머리해안.
무엇보다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가 맞아야 하고 비바람이 거세면 출입이 금지되기에 매일 오전 9시부터 문을 여는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다.
미끄럽지 않은 편안한 신발을 신고 용머리해안으로 향한다.
용머리해안이 자리 잡은 서귀포시 안덕면에 이르기 전부터 저 멀리 시선을 사로잡는 커다란 돌덩이는 '산방산'이다.

'산방산' 하면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의 봉우리를 뽑아 던진 돌산으로 통한다.
실제 백록담 주변 둘레와 산방산 둘레가 비슷하다니 참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다.
그러나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
우뚝 선 산방산은 한라산 이전에 생성됐다.
그리고 산방산과 한 묶음처럼 제주의 지질학적 특징을 보여주는 용머리해안은 한라산과 산방산보다, 그리고 무려 제주 본토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화산체다.
명실상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땅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수성화산 분출은 단 한 번, 단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여러 분화구에서 계속되었다.
화산 분출 도중에 화산재에 분화구가 막히면서 분화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돼 각기 다른 3가지 방향으로 쌓여있는 화산재 지층을 볼 수 있는 곳이 용머리해안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쓸려 화산체가 깎여 나가고 다른 곳에서 수증기를 타고 날라 온 화산재가 다시 쌓이고 또 바다와 바람에 깎여나간 제주 최초의 땅이자 태곳적 땅 용머리해안.

어딘들 마찬가지겠지만 용머리해안만큼은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직접 봐야한다.
용암과 바다,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에 압도당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얽히고설키는 곳에 서면 - 갖은 풍파 속에서 이 땅이 지켜온 100만 년 세월의 장엄한 무게가 그려진다.
작은 방처럼 움푹 들어간 굴방이나 드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가 펼쳐져 장관을 연출하고,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사암층과 파도가 만들어낸 해안 절벽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안덕면 사계리와 화순리 경계에 있는 용머리는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란다.
이 땅이 영험한지라, 제왕의 탄생을 우려한 진시황이 사자 고종달을 보내 이곳의 혈맥을 끊기를 명했다.
가히 산방산에 영기가 서려 있고, 산방산 남쪽 밑은 용이 날 자리가 틀림없다고 여긴 진시황제의 사자는 마침내 용의 허리와 꼬리를 끊었다.
그때 산방산이 몇 날 며칠에 걸쳐 소리를 지르며 울었고, 바위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전해진다. 가까이 산방산을 마주한 용머리해안에 서 있노라니, 마치 산방산을 절규와 눈물을 밟고 선 양 오묘하다.
용의 피가 솟구쳐 만들었다는 그림 같은 기암절벽들을 시선을 사로잡는 가운데, 때로는 솟구치는 용암의 증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뻥뻥 구멍 뚫린 자국이며 시루떡같이 층층이 쌓인 지층 등 제주 최초의 속살을 만나는 환희가 있다.
바닷물이 철썩이는 곳에선 거북손과 갖은 어패류들이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다.
제주 할망과 아낙들이 멍게며 해삼이며 좌판을 펴고 관광객들을 붙잡는다.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짧디짧은 인생은 그저 겸손해진다.
놀멍 쉴멍 걸으멍 - 더하여 쉴 새 없이 사진 찍으멍 걷다 보면 딱 한 시간이 걸리는 용머리해안 -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두말할 것 없이 고사리해장국이다.
태초부터 화산의 땅이라는 숙명은 물과 곡식의 부족으로 가난이라는 단어를 이고 살았다. 이 땅에서 물이 많아야 하는 논농사는 어불성설. 오랫동안 제주를 먹여 살린 두 가지 작물은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다년생 양치식물 고사리는 길고 튼튼한 뿌리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단단히 내렸고 빗물을 저장했다.
곶자왈에서도 한라산 표고 1000m 이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좀고사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북단 두만강이나 압록강에까지 서식하는 골고사리, 큰지네고사리 등 북방계 식물이 군락을 이룬다. 이 고사리가 제주 생태계의 시작이자 식재료의 시작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독성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이 고사리를 삶은 뒤 말려서 독성과 쓰린 맛을 제거한 뒤 일 년 내내 즐겼다.
제사나 명절에도 고사리를 올렸다.
하물며 먹을 것 부족한 제주에서 고사리가 얼마나 귀한 식재료였는지 말해 무엇하리.
"아직 길 잃음 사고 주의 안 뜬 것 보면 고사리 철은 조금 이른가봐."
제주가 좋아서 아예 제주 모경찰서로 발령받은 여동생이 안내를 자처한다.
고사리는 날 때 톡톡 끊어주면 두세 번 더 키워서 먹을 수 있다니 왜 산으로, 들로 아낙들이 바지런히 나서는지 알 수 있다.
고사리해장국은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다.
예부터 논농사 못 짓는 제주에서 소보다는 돼지가 키울 수 있는 가장 친근한 가축이었고 어지간한 잔치에서는 항상 돼지가 멱을 따며 잡혔다.
도마에 뭉텅뭉텅 썰어 내는 돔베고기며, 고기붙이 나누고 나서도 돼지 뼈로 곤 육수는 어디든 활용 가능했다.
해조류 모자반을 넣고 뭉근하게 끓이면 '몸국(모자반국)'이 되고, 뼈붙이 덩어리를 한 개라도 넣으면 '접작뼈국'이 되고, 고사리를 넣고 끓이면 '고사리해장국'이 됐다.
육지에서 즐기는 '육개장'에서 보듯 고사리는 소고기를 대신하는 식감과 질감을 갖고 있는 터, 여기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까지 풀면 걸쭉하면서 감칠맛도 은은하게 탑재한 고사리해장국이 된다.
김이 폴폴 나는 고사리해장국을 보면 생긴 건 메밀가루 때문에 약간 갈색이 섞인 거무튀튀한 빛깔이지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이내 구수한 맛이 일품인 고사리와 메밀 쌍두마차가 혀를 부드럽게 자극한다.

메밀 전분이 풀어져서 걸쭉한 국물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누구 말처럼 "나 고사리야 나 메밀이야" 하는 정도랄까?
"제주 사람들은 이 맛을 '베지근하다'고 표현하거든. 베지근하다는 말로 싹, 정리 된다."
벌써 제주 생활 5년 차에 접어든 여동생이 아는 체를 제법 한다.
'베지근하다'는 제주 사투리로 고기 따위를 푹 끓인 국물이 구미가 당길 정도로 맛있다는 의미다.
기름진 맛이 깊으면서도 담백할 때 이 표현을 쓰는데, 그만큼 속을 든든하게 채운다는 의미도 있다.
어쨌거나 "국물맛이 베지근하우다!" 하면 맛을 제대로 칭찬하는 최상급 표현이란다.
밥 한 공기 말면 고사리해장국의 농밀한 국물이 더욱 걸쭉해진다. 흡사 죽처럼 되직한 고사리해장국은 입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술술 넘어간다.
제주 사람들의 인생은 가난과 통한의 연속이었으나 이들은 기어이 이리도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낳았다.
고사리해장국집 창 너머로 유채꽃 일렁이고 우뚝 솟은 산방산이 보인다.
산방산 발아래 엎드린 용머리해안도 그려진다.

오늘만큼은 고사리해장국으로 백만 년을 관통한다.
자연도, 인간도, 이 감사한 음식을 맛 봬 준 식당 주인장도, 무엇보다 타향살이를 잘 견디고 언니의 제주 손발이 되어준 여동생도, 우리 모두 다들 "폭싹 속았수다."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의미의 제주도 방언)
◆ 제주 사계리 용머리해안
주소 |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112-3
영업시간 | 연중 상이 (* 입장 시간 꼭 확인)
문의전화 | 064-760-6321
※ 주차장 있음·제주도민 외 입장료 있음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3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의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난 글을 쓰고 싶다.
[자료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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