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금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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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몇 달 전 친척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나는 사촌인 H 오빠와 식장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축의금을 받았다. 방명록을 정리하고 식권을 나눠주다 보니 어느덧 식이 시작됐고 로비에는 우리와 돈만 남았다. 그러자 문득 ‘우리는 축의금을 받기에 위험한 조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 10년 전, 여름의 끝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다둥이 아버지였던 터라 그때 모인 직계가족만 서른 명이 넘었는데 발인 날 우리는 산에서 대기하며 누구는 언제 어떻게 돌아갈 계획이고 누구는 그곳을 지나쳐 갈 예정이니 태워주겠다는 등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H 오빠가 지나가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내는 누구든 안 가고 며칠 더 여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H 오빠는 사촌들 중 내게 가장 먼 존재였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됐을 때 오빠는 중학생이었고, 나는 서울에 오빠는 경상도에 살고 있었으며, 우리는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 가까운 거리에 있지도 않았는데 오빠의 그 말이 아주 정확히 들렸다. 오빠는 한평생 할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 오빠의 인생에는 늘 할아버지가 함께였다.
할아버지께 앞머리가 봉긋한 묘를 만들어드린 다음 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점심을 먹으며 우리도 모레쯤 올라가자고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연휴도 아직 남았고 주말도 끼어 있으니 며칠 더 있다가 혼자 올라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부모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부모님을 동행하지 않고는 할아버지 댁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 나조차도 이유를 잘 설명할 수가 없어 H 오빠가 어제 산에서 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말하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모두가 떠나고 나는 H 오빠와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오빠는 내게 이 지역의 어디를 가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친척들 집 외에는 가본 곳이 없다고 말했다. 오빠는 뽑은 지 얼마 안 된 차에 나를 태우더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절과 계곡과 산에 데려갔다. 그러면서 이곳은 무엇 때문에 유명하며, 자기는 언제 누구와 여기에 와봤고, 그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말해주었다. 또 운전을 하는 중간중간 어떤 집과 다리를 가리키며 저것들을 다 자기가 지었다며 지금껏 무슨 일을 하며 살았고, 혹시라도 네가 이 지역으로 이사를 오면 집을 지어주겠다고 말했다. 사회생활 1년 만에 이미 실직을 한 번 경험한 내게 생각지도 못한 선택지가 생긴 느낌이었다.
서울에 올라가기로 한 날, 나는 새벽 5시에 알람을 듣고도 다시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오빠는 5시 20분쯤 나를 깨워 세수를 시키더니 30분 넘게 운전해 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부스스한 몰골로 역내에 나란히 앉아 연신 하품을 하며 고속열차(KTX)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해 말, 회사에서 깜짝 휴가를 받았을 때 나는 또 혼자 할아버지 댁에 내려갔다. 우리는 그룹 소녀시대의 연말 콘서트 영상을 보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축의금을 받는데 문득 그해의 일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알아왔고 우리만의 진한 에피소드가 있으며 서로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이유를 대며 오빠에게 우리는 축의금을 받기에 위험한 조합이 아니냐고 말했다. 오빠는 대답 대신 마스크 안에서 크게 웃었다.
김은경 출판 기획 에디터 겸 작가_ 12년 차 에디터. 를 썼다. 2022년에는 ‘성장’과 ‘실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볼 예정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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