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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당신에게 다정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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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그런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2008년, 작사 정호승, 작곡 김현성, 노래 안치환)

“어느 날 문득 나와 내 인생을 객관화해 각자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으나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인생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가난과 이별과 거듭되는 실패의 고통 속으로 그토록 토끼몰이 하듯 몰아넣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대해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날 밤 ‘술 한잔’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정호승 시인이 오래 전 한 일간지에 쓴 글(요약)이다.

2008년 안치환의 노래로 나오면서 시 첫 소절을 제목으로 바꾼 이 노래를 듣고 불현듯 술 한잔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생은 그냥 꽃길이었든지, 논할 가치조차 없겠다.

투박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불러 젖히는 그의 이 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내 창자는 여전히 조건반사다. 전주가 시작되자마자 술을 부른다.
 
이 노래는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 인생도 그랬던 것일까. 내 삶을 주관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나 운명이 있다면 내게 술 한 잔은 사주었던 것일까.

사내는 겨울의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술을 마신다. 길은 끝났다. 더 갈 곳은 없다. 남루한 주머니 속엔 지폐 몇 장뿐. 배는 고프고 술은 쓰다. 사내의 입에서는 “아, 이 X같은 인생”이란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네 삶의 찢겨진 페이지들. 그 겨울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나와 대작한 놈은 누구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생’이란 놈과 마주 앉아 나는 호기롭게 건배를 외쳤건만, 그 소리는 눈발에 묻혀 허공에 사라졌다.

열심히 살았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다. 내 인생을 사랑하려고 했다. 허구한 날 인생이란 그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술도 샀다. 그런데 인생은 날 거들떠보지 않았다. 어깨 한번 내주지 않고 술값도 내지 않고 도망만 다녔다. 내 인생 행로는 매번 꼬이고 풀리지 않았다. 인생은 그렇게 나를 배신했다. 실패와 절망과 고통과 이별과 질곡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는 몰라라 했다.

시인은 분노했다. 오죽했으면 꽃을 피울 수 없는 돌연꽃(석련, 石蓮)이 소리 없이 피어 천지간에 자비가 넘치는 날조차도 인생은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그는 ‘술 한잔’은 은유라고 말했다. “이보게 내가 언제 한잔 사지”라는 말은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서정시인’, 맑고 슬픈 감성과 위안과 치유의 시인 정호승이 술 한잔을 빌려 이런 투정과 원망의 시를 썼다는 건 사실 좀 놀랍다. 전업시인으로 드물게 성공한 그였지만, 그에겐들 시련과 고통이 없었으랴.

시인들에게 술은 술이 아니다. 시인에게 술은 눈물이자 회한이자 부끄러움이요, 위안이자 도피이자 초월이다. 정호승 시인도 아마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인생에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까.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황지우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부분)

“낮술에 붉어진/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정현종 시, ‘낮술’ 부분)

대중가요인들 다를까. 시만큼 정제와 승화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해도 임창정의 ‘소주 한잔’(2003년)은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눈물의 술이요,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1989년)은 추억과 함께 다 떠나보내고 말자는 체념의 술이다.

정호승(73)은 대중가요사에서 소월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가 노래로 불린 시인이다. 소월의 시 154편 중 약 60편이 노래로 만들어졌는데, 정호승의 시는 스스로 기억하길 70편 정도라고 한다. 1973년 등단한 그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 시집 14권에 1100편의 시를 썼다.

소월의 시는 당대의 여러 작곡가들이 곡을 붙이고 수많은 가수가 불렀지만, 정호승의 시는 안치환이 독보적이다.

2008년에 나온 안치환의 9.5집 음반 ‘정호승을 노래하다’ 재킷. 정호승 시인의 시 15편을 노래로 불렀다. 정 시인은 이 앨범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2008년에 나온 안치환의 9.5집 음반 ‘정호승을 노래하다’ 재킷. 정호승 시인의 시 15편을 노래로 불렀다. 정 시인은 이 앨범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치환은 2008년 자신의 9.5집 음반으로 ‘정호승을 노래하다’를 냈다. 여기엔 ‘인생은 나에게…’를 표제곡으로 ‘수선화에게’ ‘이별노래’ ‘고래를 위하여’ ‘우리가 어느 별에서’ ‘풍경 달다’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맹인 부부가수’ 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정호승 시에 서정적인 포크록 사운드를 입힌 15곡이 수록됐다.

안치환은 ‘시노래’의 대표적 가수다. 대표곡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정지원의 시에 그가 곡을 붙인 것이다. 정호승에 앞서 김남주 시인 헌정 앨범 ‘6.5집-나와 함께 이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도 냈다. ‘인생은 나에게…’는 그가 작곡하진 않았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작사·작곡한 김현성 작품이다.

정호승의 시 중 처음으로 노래로 만들어진 건 ‘떠나는 그대 조금만 늦게 떠나준다면…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라는 아름답고 슬픈 ‘이별노래’다(최종혁 작곡). 1985년 이동원이 먼저 노래해 밀리언셀러가 됐다.

김광석의 유작 앨범에 수록된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의 ‘부치지 않은 편지’도 정호승 시다(백창우 작곡).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내리면 눈길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가끔씩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는 유명한 시 ‘수선화에게’는 양희은과 김원중이 안치환에 앞서 부른 바 있다.

‘슬픔의 시인’ 정호승(오른쪽)과 노래운동을 해온 안치환(왼쪽)은 시와 노래로 사람들을 위안하고 치유하는 동지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7년 안치환이 가난한 노래패 친구의 결혼식에서 축가로 부르려고 곡을 붙인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시작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우리들 삶이라는 절벽이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바로 안치환이라는 한 젊은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슬픔의 시인’ 정호승(오른쪽)과 노래운동을 해온 안치환(왼쪽)은 시와 노래로 사람들을 위안하고 치유하는 동지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7년 안치환이 가난한 노래패 친구의 결혼식에서 축가로 부르려고 곡을 붙인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시작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우리들 삶이라는 절벽이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바로 안치환이라는 한 젊은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정호승 시인은 안치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안치환은 위안의 가수다. 우리 시대의 고통의 눈물을 닦아주는 치유의 노래꾼이다. 안치환은 가난한 영혼의 가수다. 그의 노래 속에는 기도와 연민이 있고 사랑과 운명이 있고 역사와 조국이 있다. 그의 노래 속에는 눈물 젖은 손수건이 한 장씩 다 들어 있다. 그 손수건으로 나의 슬픈 삶의 눈물을 닦아도 좋고 조국의 고통스러운 눈물을 닦아도 좋다. 이제 나의 시는 그의 노래를 통해 나를 떠났다.”

정호승 시인은 등단 50주년을 맞은 지난해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14번째 시집을 냈다. 그에게 인간의 존재와 삶은 비극적 존재이고 슬픔은 운명이다. 그가 시를 쓰는 이유라고 했다.

시인은 여전히 인생이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지금은 분노와 원망에 의해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 결국 고통의 방법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다행히 시는 은유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은유의 숲속에 역설과 반어의 잎으로 짐짓 나를 덮는다. 그래서 요즘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었다’라고 고쳐 읽는다.”(일간지 기고문에서)

이 노랫말로 위안을 받았던 이들에게는 배반이지만 시인에게는 ‘해피엔딩’이다. 인생은 결국 빗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인가.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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