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만 있나 ‘졸며느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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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결혼한 지 25년 정도 됐고 내 나이도 얼추 환갑에 시어머니 될 즈음이니 이제 명절에 독립선언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설날이자 시어머니 생신이자 남편 생일인 그 중요한 날, 난생처음 시댁에 가지 않고 혼자 제주 여행을 감행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를 각오로 독립선언을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싱겁게 끝나버린 부전승이었다. 결전의 각오는 쓸데없는 기우였다.
결혼 이후 명절은 무조건 시댁이 먼저였다. 구정은 시어머니 생신이니 먼저 가야 했고 신정은 새해 첫날이니 시댁 먼저였다. 처음엔 의당 그래야 하는 줄 알았으나 세월이 가며 부당하다 느꼈다. 부부싸움의 단골 주제였다. 그러나 다툼이 커지는 게 싫었고 친정엄마도 딸이 무탈하게 사는 걸 원했기에 ‘까짓 명절에 하루 나중에 친정 가는 것쯤이야’ 하고 넘기곤 했다. 시댁은 선물도 큰 것, 용돈도 듬뿍이었다. 친정은 언제나 잉여의 신세였다. 시댁은 왜 여자에게 상위 개념인 것일까? 며느리는 왜 가서 일을 하고 사위는 왜 대접만 받을까?
설날 시댁은 시어머니의 동생과 동생의 아들딸, 손자, 강아지까지 수십 명이 와서 식사를 하고 가느라 나는 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장을 봐야 하고 전을 부치고 상을 차리고 과일을 깎아야 했다. 안 하던 일을 결혼했다는 이유로 낯선 시댁 친척들 앞에서 해야 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외딴섬같이 외로웠고 어색했다.
시댁 친척들이 가고 나면 월남한 시아버지의 옛 동네 친구라는 영천 할머니가 며칠 묵어갈 요량으로 보따리 싸서 오시곤 했다. 명절은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30분이면 가는 친정은 멀고도 멀었다. 나이 많고 손 무딘 4대 독자 외며느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굼뜨고 어리바리한 존재였다. 군대와 시댁은 비슷한 건지 시댁의 시계는 유난히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이제 시어머니 동생들도 여든 후반이 돼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들도 각자 명절을 보내고 잠시 모여 얼굴 보고는 갈 길을 간다. 보따리 싸서 며칠씩 묵어가며 용돈도 받아가시던 영천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졌는지 언젠가부터 안 오신다. 그땐 귀찮기만 했는데 이제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이제 결혼 30년 차 돼가는 외며느리는 대차게, 아니 자연스럽게 명절에 시댁에 안 간다. 남편만 보낸다. 아니 남편 가는 건 자유다. 사실 시어머니도 며느리가 가면 거실 소파에 러닝 바람으로 누워 다리 한쪽 소파에 걸치고 임영웅 노래 나오는 방송 못 보신다. 분명 어머니도 아들만 오는 게 좋으실 게다. 청소도 대충, 설거지도 좀 미뤄놓고 거실바닥에 누워 손자 품 안에 끼고 TV 보다가 선잠의 오수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시어머니도 며느리 없는 명절이 편하다. 졸혼만 있는 게 아니다. ‘졸며느리’도 있다. 감사의 마음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하면 된다. 누가 누구에게 강제로 의무의 탈을 씌우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나부터 잘하는지, 꼭 두고봐달라.
윤영미
SBS 아나운서 출신으로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다. 현재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산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제주 무모한집을 소개하며 뉴미디어를 향해 순항 중인 열정의 소유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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