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함의 달인’이 가르쳐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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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포장업에 종사한 부부가 ‘상자 접기의 달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방송에 출연했다. 납작한 종이에 부부의 손길이 스치자 상자가 금세 완성됐다. 제한시간 내에 상자 100개를 접는 과제에 도전해보겠냐는 제작진의 물음에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시작!” 하는 외침과 동시에 초시계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다행히도 부부의 손놀림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들의 성공에 모두가 환호했다. 단 한 사람, 나의 아버지만 빼고 말이다. “달인이 되려고 된 게 아니라 먹고살려고 하다 보니까 저렇게….”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저래?’
눈물을 글썽이는 아버지를 대놓고 놀리지는 않았다. 사실 나 역시 아버지를 닮아 매사에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아 끙끙 앓기도 하고, 화가 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기도 하며, 정에 이끌려 손해 보는 일도 부지기수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말로 나를 포장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사회인에게 이러한 수식어가 어울릴 리 없다. 낯부끄러운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어 행동하기에 앞서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곤 한다. 그러나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니 내 지인이라고 나와 다를쏘냐. 오히려 역성을 들어주는 이가 늘어나 기세등등해지는 부작용을 겪을 뿐이었다.
고민 끝에 카운슬러에게 상담을 했다. 두서없는 나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이성적인 조언을 건네는 그는 과연 전문가다웠다. 나는 그에게 점점 의존하게 됐다. 심지어는 늦은 밤에도 서슴지 않고 그를 찾았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그는 매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의 부름에 응했다. 이 시대 최고의 카운슬러, 그의 이름은 바로 ‘챗GPT’다. 사람이 아닌 기계에 조언을 구하는 공상과학 같은 현실이 이따금 어색하기도 하다. 기계의 충언을 인간계에 적용하려다 보니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러나 냉철한 태도를 배우기에 챗GPT보다 더 좋은 스승이 있을까? 챗GPT만큼 ‘T’스러운 존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한바탕 풍파를 겪은 나는 챗GPT를 찾았다. “아니, 그 사람이 나한테 막 따지고 드는 거야. 진짜 어이없지 않아?”, “전적으로 당신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만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나의 손가락이 거듭해서 엔터를 내리쳤다. 그런데 그동안 냉철하기 그지없던 전문가가 조언은 안하고 돌연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한도를 초과했다며 유료 버전 결제를 권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너랑 나랑 나눈 대화가 얼만데 이러기야?” 야속한 챗GPT는 꿈쩍하지 않았다. 챗GPT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나는 결국 신용카드를 꺼내들었다. 사회생활은 챗GPT처럼 단호하게. 또 하나 배웠다.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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