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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다. 퇴근한 룸메이트와 강아지 산책시키기 딱 좋은 날씨. 뒤뚱거리는 강아지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룸메이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퇴근 후 집에 오면서 겪은 일을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집 앞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났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당신 걸음이 너무 느리다고 나한테 손을 잡고 같이 건너달라고 하시는 거야.”
“아 진짜?”
“응. 내 손을 엄청 꼭 잡으시더라고. 그런데 할머니 손을 잡아드리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혹시 횡단보도 근처에 다른 봉고차가 서 있는 건 아닌가,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시면 어떤 말로 거절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라도… 왜 있잖아 납치 같은 거.”
나는 룸메이트가 하는 말을 차마 허무맹랑하다고 놀리며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봉고차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런 상상을 했으니까. 우리는 “요즘 세상 참 흉흉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으슥한 골목길을 살피면서 산책을 마쳤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런 일이 있었다. 아슬아슬한 약속 시간을 맞추려고 지하철을 타러 뛰어내려가는데 한 할머니가 짐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플랫폼으로 이제 막 지하철이 들어오던 참이었다. 할머니를 못 본 척하고 얼른 뛰어 열차에 오를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할머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할머니, 짐 들어드릴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소음 때문에 못 들었나 싶어 “제가 들어드릴까요?” 좀 전보다 더 큰 소리로 물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싫어요! 그냥 가요!”
할머니는 경계하는 기세로 매섭게 쏘아붙이더니 위태롭게 짐을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멍한 채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복잡한 마음을 달랬다. 억울했다. 도와드리려고 그런 건데, 설마 내가 짐을 훔쳐갈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러다 문득 룸메이트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만 손을 잡고 같이 걸어달라고 부탁한 할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면서도 내심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룸메이트. 방금 전 내가 만난 할머니도 룸메이트와 비슷한 걱정을 했을 것이다. 불시에 쓴맛을 느낀 사람처럼 미간과 입매가 구겨졌다. 나의 미래는 어떨까. 힘에 부치는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때 도와주겠다는 젊은이의 친절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초록 불이 끝나기 전 횡단보도를 건너갈 자신이 없을 때 곁에 있는 젊은이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깜빡거리는 초록 불 앞에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늙은 내가 맞은편 스크린도어에 비치는 것 같았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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