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역사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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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스포츠 문화사가 전공이다 보니 과연 스포츠 역사와 그 관련 연구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많다. 기본적으로 스포츠 역사는 스포츠가 발전해 온 과정을 파악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수업할 때나 학생들과 토론할 때 가끔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과거의 스포츠 역사가 현재와 미래의 스포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스포츠 역사가 적어도 현재의 스포츠문화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스포츠 역사의 쓰임새가 어디에 있는지 정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스포츠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기초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학스포츠 활성화 정책과 미국 대학스포츠의 이면
최근 10여 년간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현안이자 고민거리는 학원스포츠 문제였다. 학원스포츠 현장에서는 각종 비리와 인권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더욱이 대한민국 스포츠를 이끌어 나갈 선수들의 육성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 중에는 대학스포츠의 활성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때 높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대학스포츠가 이제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학스포츠 발전 방안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며, 자연스레 대학스포츠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미국 대학스포츠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미국 대학스포츠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어떻게 한국에서 수용할 수 있을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과거의 미국 대학스포츠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어떤 부수적인 제도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부분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대학스포츠의 발전을 주도하며, 대학스포츠 중 가장 큰 수입을 올리고 있는 아메리칸 풋볼(American Football)의 사례는 스포츠정책 수립에 있어 왜 스포츠 역사가 하나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아메리칸 풋볼이 미국 대학생들의 축제가 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건 학교 간의 경쟁심 때문이었다. 단순히 스포츠 명문교가 되기 위한 경쟁이 아닌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교로 발돋움하기 위한 경쟁이었다. 이 경쟁은 현재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 몰려있는 미국의 아이비리그(lvy League)에서 시작되었다.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의 아메리칸 풋볼팀이 1885년부터 1899년까지 46연승을 기록하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렀고 1914년에는 7만 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짓자, 라이벌이었던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이에 하버드대학교는 유명 감독을 영입해야 했다. 당시 대학교 아메리칸 풋볼팀의 감독 연봉은 7000달러였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교수보다 무려 30%나 높은 연봉이었다. 학내에서 논란이 될 만한 일이었지만 아메리칸 풋볼팀 감독의 연봉이 높아야 하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연했다. 기껏해야 하버드 최고 권위의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의 수강생은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하버드대학교의 아메리칸 풋볼팀은 3만 8000명이 들어차는 경기장에서 경기를 펼치기 때문이다.
예일대학교나 하버드대학교와 같은 반열에 오르고 싶었던 중부의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도 당대 최고의 아메리칸 풋볼팀의 감독을 선임해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아메리칸 풋볼을 통한 경쟁은 미국 전역의 대학으로 확산됐다. 아메리칸 풋볼은 미국 대학이 고등교육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대가 된 셈이었다.
미국 대학의 아메리칸 풋볼은 이후 폭발적 성장을 했고 그들이 거둬들인 수입은 웬만한 프로스포츠 리그와 어깨를 겨룰만한 수준까지 올라섰다. 아메리칸 풋볼로 얻은 많은 수입은 대학 내 비인기 스포츠팀의 운영비로 충당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미국 대학 내에서 일종의 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미국의 대학 아메리칸 풋볼은 내셔널풋볼리그(NFL: National Football League)과의 신사협정을 통해 지금도 대학 최고의 스포츠로 군림할 수 있었다. 대학 아메리칸 풋볼팀에 적어도 3년을 활약한 선수만이 프로 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대학과 프로스포츠 리그 간의 상생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NFL에 진출한 선수들이 경기에서 소개될 때면 늘 그들의 출신 대학이 전광판이나 TV 자막을 통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학이 이를 통해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이러한 미국 대학 아메리칸 풋볼과 NFL과의 상생은 대학스포츠와 프로스포츠가 과거와는 달리 단절되어 있는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하지만 미국 대학스포츠의 장점을 한국에서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제도를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메리칸 풋볼의 경우처럼 어떻게 미국 대학스포츠가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시대적 맥락과 함께 이해해야 한국적 변용이 가능하다. 새로운 스포츠정책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전문가들이 만드는 제도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문화가 그 제도에 호응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부카츠(部活)의 빛과 그림자
완벽한 제도는 사실상 이 세상에 없다. 오직 완벽에 가깝게 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제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스포츠 제도는 성공의 역사라기보다는 실패와 개선의 역사라고 보는 게 타당할 지도 모른다.
‘공부하는 학생선수’와 ‘운동하는 학생’ 만들기라는 면에서 한 번쯤은 살펴봐야 할 사례는 일본의 부카츠(部活, 특별활동) 제도다. 부카츠는 일본의 중·고등학생들이 지식편중 교육에서 벗어나 건전한 교과 외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1968년에 시작되었다. 부카츠에는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 다양한 활동이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각종 스포츠 특별활동부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신체활동과 공부를 균형 있게 하는 ‘문무양도(文武兩道)’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부카츠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였다.
하지만 초반의 부카츠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치열한 입시경쟁이 이뤄지고 있던 일본의 진학 명문교들이 부카츠를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공부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특별활동을 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일본 정부는 1972년 부카츠를 의무화시켰다. 이때부터 일본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일주일에 1시간씩 모든 학생들이 부카츠에 참여해야 했다.
이후 부카츠는 점차 일본 중·고등학교 학창생활의 일부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스포츠 특별활동부에도 일반학생들이 많이 가입하다 보니 교육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문화도 생겨났다. 일본 고등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야구부 감독도 현직 교사가 맡는 비율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야구부 감독을 현직 교사가 겸직하다 보니 고용안정성이 확보되어 과거에 비해 감독 관련 비리가 줄어드는 영향도 발생했다. 무엇보다 각종 스포츠 특별활동부에서 일반학생과 운동특기생들이 서로 어울리게 됐다는 점은 중요했다. 운동특기생들은 일반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학업과 학교생활에 대해 도움을 받고, 반대로 일반학생들은 스포츠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됐다. 이 와중에 운동특기생들은 스포츠선수로서가 아니라 일반사회인으로 진로를 모색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부카츠 중에서도 스포츠활동은 과열됐다. 부카츠의 결과가 대학입학을 위한 내신성적에 반영됐기 때문이었다. 경기결과에 목을 매게 되는 과열현상 때문에 일본 정부는 2002년 부카츠를 다시 자발적 선택과목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부카츠가 선택과목이 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 문제는 부카츠를 담당하는 일반교사들이 근무수당을 받지 못하는 폐단이었다. 더욱이 선택과목이 됐음에도 여전히 부카츠를 원하는 많은 학생들을 지도해야 했던 일반교사들의 초과근무가 일상화되면서 과로사 문제까지 생겨났다. 2010년대 일본의 사회 문제가 된 이른바 ‘블랙 부카츠’ 현상이었다.
블랙 부카츠의 폐해가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부카츠의 순기능은 엘리트스포츠에서 발휘됐다. 2016 리우 올림픽의 400m 계주에서 일본 육상 남자대표팀이 은메달을 획득하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이 4명의 계주선수들 중에는 학교에서 부카츠를 통해 육상에 입문했던 선수 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부카츠가 엘리트선수층 확대에 도움이 됐다는 증거였다. 일본은 육상뿐만 아니라 수영, 레슬링 등에서 학교에서의 부카츠를 통해 발굴한 선수들을 스포츠클럽에 참여하도록 하여 국제대회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토털 사커(Total Soccer)
유망주 확보라는 측면에서 네덜란드 축구는 하나의 모범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네덜란드 인구는 17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월드컵 3회 준우승, UF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UEFA European Championship) 1회 우승 등을 기록한 대표적인 축구 강소국(强小國)이다. 네덜란드의 축구 신화는 1970년대 요한 크루이프(Johan Cruyff)를 앞세운 ‘토털 사커’ 혁명과 함께 시작됐다. 토털 사커는 공격과 수비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순간적으로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의 전천후 능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전술적 유연성은 모든 선수가 창의적인 전진 패스를 통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에서 진짜 배워야 할 부분은 또 다른 의미의 ‘토털 사커’다. 네덜란드는 사실상 모든 국민이 클럽에서 축구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이미 1978년 네덜란드왕립축구협회(KNVB: Koninklijke Nederlandse Voetbalbond)에 등록된 선수는 100만 명을 돌파했고 이 중 약 20만 명이 유소년선수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 전체 인구에 약 7%가 클럽 소속으로 축구를 즐겼으며, 유소년선수의 수도 전체 인구에 약 1.4%에 달했다는 의미다. 현재 네덜란드왕립축구협회에 등록된 선수는 120만 명이며, 그중 유소년선수의 수는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래서 네덜란드 어린아이들에겐 ‘어느 클럽을 응원하는가’보다 ‘어느 클럽에서 뛰고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얘기도 회자된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실제로 유소년 축구클럽에서 땀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클럽에서 축구를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축구장이었다. 1974 서독월드컵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제압했던 서독의 주장 프란츠 베켄바워(Franz Beckenbauer)는 훗날 헬리콥터를 타고 네덜란드 상공을 지나면서 네덜란드가 왜 축구 강국이 되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프란츠 베켄바워는 서독에 비해 작은 국토를 가진 네덜란드에 엄청나게 많은 축구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네덜란드왕립축구협회와 축구클럽들이 축구장 건설에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7000개가 넘는 축구장이 있다.
네덜란드의 축구클럽은 기량이나 신체적 조건이 뛰어난 선수의 경우 그들의 연령대를 뛰어넘는 높은 연령대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도록 하고 있다. 네덜란드를 대표할 만한 축구 유망주를 일찌감치 걸러내 집중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클럽은 유소년축구클럽에서 축구선수로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선수들에 대한 배려도 한다. 축구선수가 아니더라도 다른 직업을 선택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그 예다. 이는 유소년 시절까지 축구선수였지만 네덜란드 사회 각 분야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인재가 많은 이유다.
스포츠정책의 참고서
미국 대학스포츠의 발전과정, 일본 부카츠의 빛과 그림자, 네덜란드가 추구한 진정한 의미의 토털 사커는 그 자체로도 대한민국 스포츠정책 수립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이 어떻게 대중의 문화가 되어 해당 국가의 스포츠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해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스포츠정책 관련 기관들이 어떻게 시대 흐름에 맞게 제도를 바꾸고, 가급적 많은 이해관계자가 만족할 수 있도록 하는 보완 장치를 마련했는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스포츠정책의 성공은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 형성된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쉽게 말해 일상적으로 대중들이 경험하고 실행하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스포츠 제도가 문화로 발전하는 과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는 스포츠 역사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던 과거 스포츠의 모습을 복원하는 스포츠 역사가 스포츠정책 등 관련 분야와 협력해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에 기여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발행하는 <스포츠 현안과 진단> 141호에 게재된 기고문 입니다.
*이번 호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과학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밝힙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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