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동백림 지나 호리병 속 별천지서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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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 옥룡사지 동백나무 숲 & 경남 하동 쌍계사
비움은 채움의 시작이다. 자리를 지켰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채워지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텅 빈 자리에 새로움이 들어서고 나서야 비우는 과정이 꼭 필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전남 광양시 옥룡사지에는 절 대신 동백림이 있다. 동백림은 사라진 옥룡사 대신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가장 혹독한 계절, 겨울에 꽃을 피워내는 붉은 동백은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결실을 피워내는 우리 삶과 닮았다. 동백나무 덕분에 옥룡사가 사라진 것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화려했던 옥룡사의 흔적을 메운 동백나무 숲은 사색을 부른다. 상실에 대한 슬픔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그 빈자리를 아름답게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천년의 동백 숲길 옥룡사지 동백림
전남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 숲은 천년의 숲길을 품은 백운산의 지맥인 백계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옥룡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운암사를 지나서 동백나무 오솔길을 따라가야 한다. 푸르른 동백 숲 너머 높이가 40m나 되는 운암사의 거대한 황동약사여래입상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본다. 가볍게 눈을 뜬 약사여래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며 옥룡사지로 걸어갔다. 이곳은 건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옥룡사지로 가는 길에 있는 참선의 길은 상쾌한 숲 향기를 맡으며 걷기 좋다. 숲길을 지나면 탁 트인 초원이 나타난다. 1878년 화재로 옥룡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넓은 터만 남았다. 수령이 1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1만여 그루가 천년의 역사를 대신 말해준다. 수분이 많은 동백나무 잎은 불길을 막아주는 방화수의 역할을 하기도 해서 남부지역 사찰 주변에는 동백나무 숲이 많이 조성돼 있다고 한다.
붉은 꽃을 피워내어 가장 아름다울 때 꽃봉오리를 바닥으로 툭 떨어뜨리는 동백꽃의 꽃말은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다. 봄이면 절정의 순간 자신을 던진 동백꽃들이 새빨간 꽃길을 만들어놓은 장관을 볼 수 있다. 봄이 아니라도 모든 계절이 좋다. 꽃이 지고 없어도 울창한 숲이 강렬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어 방문객에게 상쾌한 에너지를 준다.
이곳 동백나무 숲은 신라 말기 승려 도선국사가 옥룡사 땅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동백나무를 심은 것에서 시작됐다.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은 땅의 약한 기운을 바로 세우고 강한 기운은 눌러서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했다. 옥룡사지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탄하고 양지바른 터에 위치하고 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푸르른 들판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옥룡사지의 끝에는 소망의 샘이 있어 소원을 빌며 샘물을 마실 수 있다. 우리는 사이좋게 소망의 샘에서 흘러넘치는 약수를 마셨다. 약수를 마시면서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샘물이 나의 소원도 이뤄줄까?
호리병 속의 꽃이 피는 골짜기, 쌍계사
광양시에서 경남 하동군 쌍계사로 행선지를 옮긴다. 전남과 경남의 경계에 있는 두 지역은 차로 이동하면 1시간 내외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깝다. 쌍계사로 향하는 길은 특별하다.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이 지은 시에 쌍계사까지 떠나는 여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적혀 있다. 최치원의 시는 1591년경 쌍계사의 스님이 바위틈에서 쪽지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제목은 ‘화개동-꽃이 피는 골짜기’다.
동쪽나라의 화개동 골짜기에는 호리병 속 별다른 하늘 있는지
신선이 옥 베개를 밀쳐둔 채로 몸과 세상 어느덧 천년이 갔네
봄이 오면 꽃은 땅에 가득하고 가을 가니 낙엽 하늘을 나르네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 있어 본래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네
호리병 속의 다른 세계는 바로 이곳 화개면에 위치한 쌍계사를 말한다. 신선이 옥 베개를 밀치고 별천지에 머물러 있는다는 시구처럼 쌍계사의 입구는 호리병의 주둥이처럼 좁은 일주문으로 시작된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화사한 일주문의 돌다리를 건너면 쌍계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면 호리병의 중간 허리인 금강문으로 갈 수 있다. 금강문 안에는 불교의 수호신들이 용맹한 자태로 문을 지키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팔영루에 도착하니 드디어 쌍계사의 대웅전을 만날 수 있었다. 대웅전 앞에 하동 쌍계사 구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석탑 안에는 석가모니의 사리와 전단나무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양측에는 국보인 진감선사탑비와 석등이 세워져 있다. 신라 말의 명승인 진감선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비는 당대의 문장 연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국보로 지정됐다.
수많은 보물과 국보가 보존돼 있는 쌍계사는 역사적으로도 높은 가치가 있지만 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평안과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쌍계사 입구에 쓰인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라는 글이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 짧고 가는 것이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조용한 사찰의 이곳저곳을 걸으면서 ‘그 무엇이든 살아있는 그 자체로 행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십 수년 동안 나를 가득 채운 일상이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일터로 갔다. 안정적이던 나의 일상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의 통장을 채워주던 월급도, 내가 누군지를 알려주던 직장의 명함도 사라졌지만 그 비움의 시간을 차지한 것은 두려움보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였다.
조용한 사찰에서 그 시간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희미해졌던 채움의 미학이 내 안에 새롭게 피어올랐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고 불안해할 것 없다. 나는 두렵지만 행복할 것이고 시간에 ?기지 않고 여유로울 것이다. 마침내 안락해질 때까지 비움을 나만의 방법으로 채워나갈 것이다.
조유리 작가
여행작가이자 인스타그램(@curryuri) 팔로워 19만 8000명을 보유한 인스타 셀럽.
남편인 코미디언 김재우와 함께 ‘카레부부’로 불린다. 저서로 <카레부부의 주말여행 버킷리스트>(2021)가 있다.
박스기사1
카레부부가 추천하는 사진스팟
시원하게 펼쳐진 초록 들판 옥룡사지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는 옥룡사지는 1만 그루의 동백나무를 주변에 두고 푸르른 자연 속에 둘러싸여 있다. 조용하고 평안하지만 막힌 곳 하나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에서 사진을 찍어보자. 액자에 넣고 싶을 만큼 멋진 배경이 함께 찍힐 것이다.
화려한 처마 아래에서 칠불사 원음각
칠불사의 범종이 있는 원음각의 모습은 화려하면서도 단정하다. 화려한 칠불사 처마의 오묘한 색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면 한국적 전통미가 담긴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박스기사2
함께 가면 좋은 여행지
천년 온돌방 보존된 칠불사
쌍계사만큼 유명하지 않지만 칠불사도 아름다운 건축물과 화려한 처마가 볼 만한다. 칠불사의 특이한 점은 신라시대의 ‘아(亞)’자 방터가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자방은 온돌 방식으로 신라시대 때 축조돼 천년이 지나오는 동안 한 번도 고친 일이 없다고 하니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난방을 위해 온돌을 이중으로 구축했는데 그로 인해 한 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100일 동안 따뜻했다고 전해진다.
칠불사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1세기경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외삼촌인 인도 승려 장유보옥선사(長有寶玉禪師)를 따라 칠불사에 와서 수도한 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해 ‘칠불사’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길 528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 숲
1998년 8월 3일 사적 제407호로 지정됐다. 옥룡사지는 통일신라 말기의 뛰어난 고승이자 풍수지리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이 35년 동안 머무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다가 입적한 곳이다.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주소 전남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산 35-1
전화번호 061-795-2418
쌍계사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이 선종(禪宗)의 육신인 혜능스님의 두개골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한 혜소 진감(眞鑑)선사가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대가람을 중창했다.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날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주소 경남 하동둔 화개면 쌍계사길 59
전화번호 055-883-1901
입장료 성인:2500원 / 하동군민:1000원 / 화개면민, 만 18세 미만, 경로, 국가유공자, 장애중증, 장애경증 본인:무료 (문화재보존구역 입장료)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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