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다이빙이 삶의 길 알려줘 27m 하늘 위에 나만의 작품 남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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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다이빙은?
익스트림스포츠 클리프다이빙(절벽다이빙)에서 유래했다. 남자 선수는 27m, 여자 선수는 20m 높이의 다이빙대 위에서 경기를 펼친다. 위험요소가 많아 국제수영연맹 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2013년 바르셀로나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정식 종목이 됐고 국내에는 2019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때 처음 선보였다.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기다리고 있다. 전 세계 하이다이빙 선수는 약 110명이다. 우리나라는 등록 선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초·국내 유일 하이다이버 최병화
한눈에 담기조차 힘든 아찔한 높이의 다이빙대 위. 우주를 향해 돌진하는 로켓처럼, 두 다리를 곧게 뻗은 다이버가 푸른 물빛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체공 시간은 단 3초. 지구는 엄청난 중력가속도로 그를 끌어당긴다. “풍덩.”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아래로 사라진 다이버 주위로 사방에서 안전요원들이 달려든다. 이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선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살아 있다’는 신호다. 점수보다 생존이 먼저인 스포츠, 하이다이빙(High Diving)이다.
최병화는 대한민국 최초이자 국내 유일의 하이다이버다. 지난 7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2023 제20회 국제수영연맹 세계선수권대회에 와일드카드(초청선수)로 참가했다. 그는 대회를 앞두고 ‘살아 돌아오기’를 목표로 삼았다. 하이다이빙은 워낙 위험 요소가 많아 경기를 끝마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탓이다. 선수들은 건물 10층 높이와 맞먹는 27m 다이빙대에서 떨어지며 고난도의 기술을 펼친다. 몸이 수면에 맞닿을 때 속도는 최대 시속 100㎞에 달한다. 부상을 막기 위해 바로 선 자세로 입수해야 하고 입수 직후엔 물속에서 대기하고 있는 안전요원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려야 한다. 경기를 마친 최병화는 “4라운드를 다 마치고 아직 살아 있으니 만족한다”며 웃었다. 성적은 23명 가운데 23위, 최하위였다. 그의 누리소통망(SNS)에는 ‘대한민국 1등보다 세계 23위가 낫다’는 응원 댓글이 답장처럼 달렸다.
‘꼴찌’를 향한 찬사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이 종목에 입문한 지 7년 만에 세계무대 데뷔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엔 하이다이빙 선수 등록 시스템조차 없다. 최병화는 국제수영연맹의 초청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지만 대한수영연맹이 인정한 국가대표는 아니다. 훈련과정은 험난했다. 우리나라엔 27m 높이의 다이빙 플랫폼이 없는 것은 물론 등록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10m 높이의 정규 다이빙 시설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코치가 없어 홀로 동영상을 보고 기술을 익혔고 자비를 들여 해외 훈련캠프에 참가했다. “청약통장 날리고 집도 차도 날렸다. 재산을 하나씩 정리해가며 여기까지 왔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최병화를 만났다. 치밀한 자기관리로 다진 완벽한 근육질의 몸, 인터뷰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는 시선, 청자를 향해 정확히 뻗어내는 단단한 목소리. 거기에 반 묶음으로 내린 긴 머리까지. 운동선수보단 예술가에 가까웠다. 그는 하이다이빙이 ‘인생을 함축한 예술’이라고 했다.
세계선수권대회 도중 진행한 인터뷰에서 자주 울먹였다.
하이다이빙은 우리나라에선 비인기종목도 아니다. ‘비인식종목’이다. 큰 주목을 받으니 영광스럽고 감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7년간 쉬지 않고 훈련했는데 ‘타이틀’이 생기고 나서야 세상이 알아주는구나 싶었다.
국내엔 하이다이빙 선수 등록 시스템조차 없다. 어떻게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자격을 얻었나?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려면 앞서 열리는 하이다이빙월드컵에서 순위 안에 들어야 한다. 월드컵은 이전 대회 경력이 있어야 출전할 수 있는데 신인의 경우 최근 6개월간의 훈련모습을 담은 영상 등을 제출해 실력을 증명한다. 3년 전부터 꾸준히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운동을 그만두겠단 생각으로 모든 걸 쏟아부었고 월드컵 출전권을 따냈다. 그렇게 힘들게 올해 5월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경기 중 뇌진탕 증상을 느꼈다. 그저 4라운드까지 무사히 마치자는 마음이었다. 24위까지 세계선수권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데 29위를 했다. 그런데 부상 등의 이유로 출전을 포기하는 선수들이 생겼다. 극적으로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출전 통보 이메일을 확인하고 눈물을 쏟을 뻔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훈련비를 마련할 만큼 여건이 좋지 않았다. 4차 시기에 선보인 기술(뒤로 서서 세 바퀴 돌며 마지막에 반 바퀴 틀어 입수)도 일본 현지에서 처음 시도한 거라고.
4차 시기 기술은 경기 당일 아침에 한 번 연습한 게 전부다. 우리나라엔 27m 다이빙 플랫폼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시도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등록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10m 높이의 정규 다이빙 시설도 이용하기 어려웠다. 동호인들을 위한 시설을 찾아 전국을 전전했다. 지상훈련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축구선수가 안방에서만 연습한 격’이다. 울릉도, 제주도, 여수 등에서 절벽 다이빙도 해봤지만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섬까지 오가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한 번 낙하한 뒤 다시 절벽에 오르는 동안 체력은 바닥난다. 중국, 미국, 유럽 등 체계가 갖춰진 해외로 훈련을 다녔다. 캠프가 열리면 전 세계 선수들이 다 모인다. 방을 빌려 직접 요리해 먹고 카우치에서 쪽잠 자며 체재비를 아꼈다. 코치가 없으니 동료 선수들에게 촬영을 부탁하고 기술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어딜 가나 한국인도, 아시아인도 나뿐이었다.
출전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성적이 아쉽지는 않나?
하이다이빙 선수들 대부분 10m 정규 다이빙 선수 출신이다. 다섯 살, 여섯 살에 처음 다이빙대에 오른다. 난 스물여섯에 입문했다. 운동선수 출신도 아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인간승리다. 그러니 전 세계 인구 80억 명 가운데 23명과 싸워 이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꼴찌하고 왜 우냐’, ‘꼴찌를 지원해줄 이유가 있나’ 하는 등의 악플도 있지만 타격감이 없다. 대회 성적은 세상이 정한 줄 세우기의 한 방식일 뿐이다.
성적이 목표가 아니라면 27m 다이빙대에 오르는 동력은 뭔가?
낙하할 때의 짜릿한 쾌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우승을 위해서도,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이빙을 통해 이 세상에 나만의 예술작품을 남기고 싶다. 하이다이빙은 인생을 함축한 하나의 예술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이빙대 위에 서는 것, 거기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 찰나에 끝나는 것이 다 인생과 닮아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경제적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나을 거다. 해외에 나가서도 멸시받기 일쑤다. 뭘로 보나 대한민국의 하이다이버로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름길로 가고 싶지 않다. 예술은 원래 비상식적이고 비실용적이다.
최병화는 중학교 때까지 경영(속력을 겨루는 수영)을 했다.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 뒤엔 조정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이후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해 여러 대회에서 수상했다. 뭐든 열정적으로 했지만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대학은 두 학기를 다닌 뒤 입학 5년 만에 제적됐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접한 하이다이빙은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단 하나의 목표가 됐다. 최병화는 “살아서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다이빙대에 오를 때만이 내가 반쯤 살아 있는지 완전히 살아 있는지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이다이빙의 매력은 뭔가?
직접 보면 누구나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단 엄청난 높이가 주는 위용이 있다. 우리나라엔 시설이 없으니 영상이나 사진으로밖에 보여드릴 수 없어 아쉽다. 27m 높이에 올라서면 베테랑 선수라도 두려움을 느낀다. 반복된 훈련으로 이겨낼 따름이다. 매 순간 자기 자신을 극복해나가는 선수들의 모습 속에 하이다이빙의 진짜 매력이 있다.
그 뒤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친했던 동료가 지난해 훈련 중 세상을 떠났다. 언제든 누구라도 다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선수들 간에는 동업자 정신이 강하다. 상대가 잘못해 내가 더 위에 서기를 바랄 수 없는 거다. 나 역시 근육이 찢기고 고막이 파열되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겪었다. 그렇다고 하이다이빙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무모한 짓은 아니다. 27m 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한다고, 패기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항상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고 거기서 오는 신호를 빠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이를 위해 선수들은 논문까지 찾아가며 연구한다.
사범대를 졸업한 뒤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어른들은 대학에 가라고만 했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두 학기만 마친 뒤 전 세계로 여행을 다녔다.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저 먼 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석에 올라 러시아 군인과 대화를 나눴고,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는 대신 파리 뒷골목의 삶을 포착하는 데 몰두했다.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을 떠나 바이칼호수에서 다이빙한 뒤 하이다이빙의 세계에 빠졌다. 어떠한 환경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훈련을 지속하기 위해선 스스로 길을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헤쳐나가는 법을 터득했다.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태우며’ 걸어왔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길을 선택한 것, 자본주의의 방식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큰 자긍심을 느낀다.
올해 4월부터 인천수영연맹에 소속됐다. 훈련 환경은 나아졌나?
인천시체육회의 도움으로 인천시 소속 다이빙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할 수 있게 됐다. 최근엔 경북 김천, 전남 목포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소속팀 선수들처럼 연봉을 받는 건 아니다. 여전히 자비로 훈련한다. 훈련일정도 다른 선수들에게 맞춰야 한다. 일종의 ‘인턴’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엔 하이다이빙 지원 체계가 없어 도움을 받기 어렵다. 세계선수권대회조차 사비로 참가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은 훈련이라기보다는 훈련 여건을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당장 좋은 성적을 내는 것보다 하이다이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
다음 스텝은 뭔가?
이번에 23등을 했으니 다음엔 20등 안에 들어야 할까? 그런 건 무의미하다. 이번 대회에 20명이 출전했다면 20등을 했을 거고, 50명이 출전했다면 50등을 했을 거다.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앞으로도 세계 수준의 선수가 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목표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술,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하는 거다. 그것이 내가 말한 ‘예술’이다.
최병화의 조부는 1954년 마닐라 아시아게임(남자 육상 1500m)에 출전해 한국 선수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건 고 최윤칠 대한육상연맹 고문이다. 최병화는 할아버지의 생전 말씀을 왼쪽 허벅지에 문신으로 새겼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승리의 환희가 아닌 투쟁이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한 말이다. 매일 삶이라는 다이빙대 위에 오르는 인생 플레이어들을 향해 대한민국 최초의 하이다이버는 그의 언어로 이를 통역했다. “생에는 오직 단 한 가지 성공의 기준,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는가’만 있다”라고. 최병화는 현재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조윤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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