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서 마주친 ‘자의식의 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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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들어갔다가 ‘세대차이 극복을 위한 신조어 테스트’라는 항목을 보게 됐다. 신조어 유행에 늘 뒤처지는 나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신기한 조합어들이 즐비했다. ‘머선129’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의 줄임말인 ‘알잘딱깔센’도 이미 아는 나였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인터넷창을 닫아야 했다. ‘이렇게 신조어 몇 마디 익힌다고 세대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떤 공연 기획자의 북토크에 갔을 때 일이다. 서울 지하철 옥수역 고가 밑에 있는 ‘다락옥수’라는 작은 공간은 공연도 하고 북토크도 여는 곳이다. 그날은 시간이 없어서 미리 책을 사 가지 못해 행사장에서 사려고 했더니 그곳은 공공건물이라 안에서 서적을 사고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북토크에 오면서 책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민망한 일이었다. 다행히 지인인 행사의 사회자가 아내와 나를 작가에게 소개하자 자기도 내 책의 팬이라며 ‘VIP용’으로 챙겨둔 책 한 권을 선물로 주는 바람에 미리 들춰볼 수 있었다.
아내는 책을 공짜로 받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신용카드 결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에게 얼른 편의점에 가서 현금을 5만 원만 뽑아오라고 시켰다. 건물을 나가 조금 내려가니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나는 얼른 들어가서 “여기 현금인출기가 있나요?”라고 다급하게 물었고 편의점 여직원은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다. 행사가 5분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편의점 밖으로 나가 ATM(현금입출금기)이 있는 편의점을 찾아 달렸고 결국 무사히 5만 원짜리 지폐를 찾아올 수 있었다. 북토크가 모두 끝나고 기분 좋게 저자 사인을 받으며 책값으로 작가에게 직접 5만 원을 드렸다.
문제는 행사가 끝나고 나서였다. 아내가 행사장 밖으로 나오며 “저기 현금인출기 있네”라고 하길래 설마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니 정말 그 편의점 밖에 현금인출기가 있었다. 나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물을 한 병 사면서 여직원에게 아까 왜 현금인출기가 없다고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편의점 안에 없다는 얘기였는데요?”
기가 막힌 내가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를 하자 못 들은 척 했다. 한숨이 나왔다. ‘자의식의 비만’이라는 말이 있다. 처한 현실이 비루하고 미래가 너무 아득하니까 광고나 드라마처럼 높은 데로 기준을 맞춰놓고 현실은 외면하는 심리를 가리킨다. 이런 상태가 되면 과정을 무시하고 단숨에 성공하기만을 바라며 주변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끊게 된다. 내게는 편의점 점원이 그런 모습이었다. ‘언젠가 한 번에 잘될 테니 지금 시시한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과정이다. 누가 유튜버로 대박이 났다더라, 걔도 별거 아니었다더라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웬 꼰대 같은 소리냐는 말을 들을 각오로 이 칼럼을 쓴다. 유들유들한 꼰대는 되기 싫어서다.
편성준
유머와 위트 넘치는 글로 독자를 사로잡은 작가.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썼다. 현재 다양한 채널에서 글쓰기와 책쓰기 강연을 하고 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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