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인·석인 1만 3000여 점 행운 부르고 액은 막아주고 인왕산 자락에 숨은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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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 목인박물관 목석원
목인박물관 목석원(이하 목석원)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서울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을 방문했을 때였다. 근처에 함께 돌아보면 좋을 곳들을 알아보다가 군인 초소를 공립도서관으로 재조성한 숲속쉼터(옛 인왕3분초)가 있다기에 찾아가던 길이었다. 군인 초소였던 만큼 산속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 있어 찾기가 만만찮았다. 방향 표지판을 따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길 주저하지 않았건만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 결국 목적지와 반대로 정상 부근 한양도성 성벽에 다다랐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던 찰나 성벽 너머로 붉은 철쭉이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 다가가니 성벽 아래 규모를 짐작하기 힘든 너른 정원이 펼쳐졌다.
철쭉은 물론이요 벚꽃과 꽃잔디, 목백일홍, 능소화 등 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그야말로 꽃동산이었다. 꽃 사이로는 범상치 않은 석물(石物)들이 수두룩했다. 멀리 북한산까지 보이는 시원한 전경은 “와” 하는 탄성을 불렀다.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사유지만 아니라면 연재에 소개하고 싶어 그 자리에서 이곳의 정체를 검색했다. ‘목석원.’ 2006년 서울 인사동에서 문을 연 뒤 2019년 인왕산 아래 종로구 부암동으로 확장 이전한 목조각·석조각 전문 사립 박물관이었다.
나만 알고 싶은 명소
아무리 대단한 맛집이나 명소라도 나만 알고 싶은 곳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목석원이 그랬다. 목석원을 알고 있거나 다녀간 사람들도 ‘나만 알고 싶은 곳’,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곳’이라고 후기를 남기곤 한다. 아껴두고 따로 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 목석원이 자리한 곳은 부암동 산자락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박물관 앞에 주차장이 있긴 하지만 겨우 차 서너 대를 세울 수 있는 규모인 데다 주말에는 주차 불가다. 버스를 이용해도, 차로 가도 부암동주민센터에서부터 걸어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목석원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오르막 경사는 점점 가팔라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목석원에 도착한다. 부암동 좁은 주택가 언덕길 끝에서 만난 약 1만㎡(국유지 포함)에 달하는 드넓은 목석원을 마주하노라면 누구나 감탄할 것이다. 더욱이 산자의 기복(祈福)은 물론이요,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목인(木人)과 석인(石人)이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목석원 관람은 하얀집이라고 불리는 매표소 건물에서 시작된다. 티켓을 구입하면 카페에서 커피나 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한 손에 음료를 들고 목석원 구석구석을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의 백미, 야외전시장
목석원에는 총 7개의 실내전시장과 약 9917㎡(3000평) 규모의 야외전시장이 있다. 한양도성을 배경처럼 두르고 있는 야외전시장은 하얀집을 지나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이자 목석원의 백미다. 마치 비밀의 정원이나 무릉도원 같은 느낌이 든다. 야외전시장에는 각종 수목 사이로 민불(民佛)과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동자석(童子石) 등 한국의 석물들을 비롯해 일본·중국 등 아시아의 다양한 석물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석물은 무덤을 지키는 돌로 만든 물건들이다. 잠든 자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함과 동시에 사악한 기운을 막는 벽사의 기능을 겸한다. 사람의 형상을 한 석인(石人)과 석등(石燈)이라고도 하는 장명등(長明燈), 향로나 향합을 올려놓는 향로석(香爐石), 호랑이나 양·말 등의 다양한 모양의 석수(石獸) 등을 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동자석이다. 동자석은 사대부들의 무덤 앞 좌우에 마주보거나 나란히 세워져 있는 석상이다. 생전 망자가 좋아했던 술이나 떡 같은 음식, 꽃과 창 같은 상징물을 들고 봉분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복숭아를 든 동자석부터 눈과 입을 생략해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제주의 동자석까지 생김새가 다양하다. 한겨울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죽순을 찾아 나선 중국 오(吳)나라 효자 맹종이 대나무를 향해 흐느껴 울자 홀연히 눈 속에서 죽순이 솟아났다는 ‘맹종의 고사’, 왕상이라는 효자가 한겨울 계모를 위해 잉어를 잡으려 꽁꽁 언 강을 체온으로 녹였더니 잉어가 스스로 물 밖으로 올라왔다는 중국 진(晉)나라의 ‘왕상의 고사’를 상징하는 죽순과 잉어를 품에 안은 석인도 있다.
석물들의 눈·코·입 등 생김새나 표정, 옷차림, 손에 든 물건과 새겨진 기호 등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서울·경기도의 화강암, 경기의 대리암, 경상·전라도의 응회암, 제주도의 현무암 등 지역별로 다른 재질의 석물들을 비교해보는 즐거움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흡사 오브제 작품처럼 한곳에 무리지어 있는 향로석을 바라보며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꽃집이 나온다.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하는 이곳은 꽃이나 새 모양을 조각한 상여장식용 목조각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연꽃,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다산을 상징하는 물고기, 하늘과 땅을 오가며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새까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복을 염원하는 기분이 든다.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곳
해태동산과 제주의 뜰 등 테마존을 지나 너와집까지 올라가면 맨 꼭대기에 호랑이바위가 나온다. 전망이 일품이다. 부암동과 평창동의 아름다운 주택가 뒤로 멀리 우뚝 솟은 보현봉을 중심으로 북한산의 수려한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맑아도 흐려도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매 순간이 어여쁠 곳이었다.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다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감동은 개방형 수장고인 실내전시장 목인창고로 이어졌다. 목인은 나무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전통 목조각상을 말한다. 목인창고에는 인물상(人物像), 용수판(龍首板), 사람·꽃·동물 형태의 판(板) 등 상여장식용 목인 약 1만 2000점이 전시돼 있다. 대략 20~30㎝ 크기의 목인이 한데 모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고만고만해 보여도 다 다른 모양새다. 심청과 심봉사, 춘향이 등 설화 속 주인공을 소재로 한 목인부터 아들을 낳은 여자는 가슴을 드러내고 다녔던 조선 말 풍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을 드러낸 목인, 말을 탄 장군이나 일제강점기 순사, 본처와 첩 사이에 있는 양반, 무서운 표정의 저승사자 목인까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목인박물관 목석원은 ‘설록차’로 유명한 장원산업 회장을 지낸 김의광 관장의 집념이자 역작이다. 스스로를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1970년대 초, 한 외국인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등잔이며 요강, 반닫이 등 우리 민속품을 애지중지 전시해놓은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목인과 석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급속한 산업화로 서구 장례 문화가 보급되고 고속도로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상여 관련 민속품과 능의 석물들이 수없이 사라지고 훼손되던 때였다.
김의광 관장은 우리의 옛 생활풍습과 토속신앙 및 복식문화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지키고자 사재까지 털어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과 소장품을 나누고 싶어 인사동에 있던 박물관을 부암동으로 옮겼다. 인왕산 자락 아래 낡은 주택들을 사들여 전시관으로 수리하고 손수 조경 작업까지 해 지금의 목석원으로 확장했다. 박물관 내 7개 건물 모양이 다 제각각인 이유는 원래 집들의 자리와 모양을 유지하면서 목석원을 꾸몄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목인과 석물이 상여나 무덤에 쓰이던 것이라고 꺼림칙해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벽사란 게 본디 액운과 화는 막아주고 행운은 지켜주는 아주 강력한 능력이니 말이다. 게다가 상여 장식품이지만 밝고 화려하며 해학적이다. 사악한 것을 쫓아내고 흥겹게 살자는 의미까지 담겨 있어 보는 것만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목인박물관 목석원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명당이 아닐 수 없다.
강은진 객원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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