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벽 허물고 생각의 벽도 허물고 입시 기계 아닌 후배 개발자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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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게임 특성화고 경기게임마이스터고 정석희 교장
교실에서 학생들이 전부 게임을 하고 있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 각기 다른 게임이 펼쳐진다. 퀘스트가 진행될수록 함성과 탄식이 교차한다. 교사는 옆에서 게임을 잘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쉬는 시간이 아니다. 경기게임마이스터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업시간 광경이다.
학교 건물 복도 중앙은 흡사 스타트업 내부처럼 꾸며져 있다. 교실 벽을 허물어 만든 공간이다. 보드게임방 같기도, 스터디카페 같기도 하다.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 조성한 이곳에는 청소년 취향이 물씬 풍긴다. 학생들은 수시로 모여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벌인다. 학교 도서관에서는 한 학생이 얼마 전 읽은 책의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좋았다며 사서교사와 열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일반 학교에서 보기 힘든 낯선 풍광을 벌여놓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교장이다. 2020년 경기게임마이스터고가 설립되면서 초빙된 정석희 교장은 교육계 출신이 아니다. 게임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게임을 더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교과목을 편성하고 적정한 교사를 물색해 배치한 것이다. 1세대 게임 개발자 출신인 그가 오랜 전통의 교실 벽을 허물며 경계를 넘은 이유가 있다. 국산 게임은 바람의 나라, 리니지, 포트리스 등을 거치며 하나의 산업이 됐고 e스포츠란 영역으로 발전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게임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약 22조 원으로 추산된다. 해외 시장까지 고려한다면 게임 산업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산업 규모에 맞게 게임 플레이어뿐 아니라 개발자도 키워야 한다.
개방형 교장으로 임용된 그의 꿈은 명확하다. 훗날 판교테크노벨리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개발자 후배를 키우는 것. 나아가 개발자를 육성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게임 개발에 최적화된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서라면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개의치 않는다. 전국 유일한 게임마이스터고에는 매년 70~80명의 게임 개발자 지망생이 청운의 꿈을 품고 몰려들고 있다.
전국 유일한 게임 분야 마이스터고등학교장에 어떻게 임용됐나?
내겐 직업이 하나 더 있다. (사)한국게임개발자협회장이다. 1999년 협회를 만들며 업계 최초로 게임 관련 세미나를 하고, 게임 개발자 팀을 꾸려 전국을 돌며 지식을 공유했다. 게임이 산업화되기도 전이다. 판교에서 관련 일에 종사하며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게임마이스터고를 만든다며 자문을 구해왔다. 게임 전문학교를 만드는데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개방형 교장으로 임용돼 학교에 오게 됐다.
경기게임마이스터고의 현황이 궁금하다.
2020년 4월 설립해 매해 70~80명이 입학한다. 전교생은 220명 정도다. 개교 4년이 채 안 됐지만 세간의 평가는 좋다. 학생들은 이미 대학생 수준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좀 더 어린 나이에 시작한 데다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있어 가능했다. 교과 과정에 정보·컴퓨터가 있는데 초기 교원을 구성하는 데 애를 먹었다. 프로그래밍은 잘 아는 교과 담당 교사가 게임엔 문외한이라서다. 교원 자격증이 있으면서도 게임 개발에 대해 잘 아는 인력이 필요했다. 게임은 IT나 소프트웨어 산업 중에서도 최신 기술을 요구하는 산업이다. 인공지능(AI), VR, 빅데이터 등이 다 들어가기 때문이다. 연구회에서 활동했거나 게임 동아리 경력이 있는 교사를 수소문해 젊은 교사들로 충원했다.
다른 학교 수업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게임을 구동시키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게임 엔진’이라는 게 있다. 게임 산업계에서 널리 쓰는 엔진으로 수업을 한다. 게임에 사용하는 C계열(프로그래밍) 언어, 통신, 네트워크, 그래픽 등을 함께 가르친다. (콘텐츠 세계관을 구상하는) 별도 기획 수업이 있지만 모든 교과목이 게임을 만드는 데 기반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역사 시간에는 역사 소재를 각색해 게임을 구상할 수 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어떤 판단을 하고 적을 제거할지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시간에 배우는 환경오염, 항만, 조세 등도 모두 게임의 소재가 된다. 국어 시간은 스토리텔링에 유용하다.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게임 세상으로 구현할 걸 생각하면 수업이 얼마나 흥미롭겠나.
학교 공간 곳곳도 재미있게 꾸며 놨다.
3~5층 계단 앞은 열린 공간으로 조성했다. 원래 교실이었는데 벽을 다 허물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쉬거나 놀고 상담도 한다. 공간 이름도 학생들이 직접 지었다. ‘꿀잼터’라고(웃음). 처음에는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왜 멀쩡한 벽을 허무냐, 학교에 그런 공간이 왜 필요하냐 했지만 결국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됐다.
교육계에선 이방인으로 취급받기도 했겠다.
난 게임계에선 굉장히 일반적인 사람이다. 다만 교육계에선 달리 볼 수 있다. 영국 가수 스팅의 노래 중 ‘잉글리시맨 인 뉴욕’이 있다. 영국 사람이 뉴욕에서 사는 내용의 가사인데 ‘I'm an alien, I'm a legal alien(나는 이방인, 당당한 이방인)’처럼 다른 영역에 살아도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덕분에 학생들도 나를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자유롭게 교장실을 오가며 개인적인 상담도 하고 게임을 만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벽을 허물고 새로운 접근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설립 초기 관계자들이 학생들의 취업 전략을 물어왔다. 게임을 오락으로 바라보거나 교육의 틀에 넣는 걸 기피하는 부정적 시각이 여전했다. 그때 “필요하다면 한 학년이 70명 정도니까 게임회사 대표 70명에게 전화를 돌리겠다”고 답했다. 취업이 중요한 사안이긴 하나 취업률이란 숫자에 얽매일 일은 아니었다. 내가 20년 넘게 하는 얘기가 있다. 게임 인재를 육성하기보다 인재를 가르칠 사람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 내가 원하는 학교는 학생들이 졸업을 위해 거쳐 가는 곳이 아니다. 판교에서 같이 일할 후배들을 키우는 곳이다. 지금 잘 양성해서 게임 산업에 우수한 재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걸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다. 물론 게임회사에 전화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전화가 온다.
게임 산업 규모가 얼마나 되나?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2년 국내 게임시장 규모가 22조 원에 달할 것으로 바라봤다. K-콘텐츠의 약 70%를 게임이 맡고 있다. 영화·웹툰이 1조 원대인데 단순 수치로만 환산해도 다른 분야 대비 22배의 인력이 필요한 셈이다. 성장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좋은 개발자로 크면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현재 1학기가 끝난 시점인데도 고3 학생의 취업률이 40%가 넘는다.
학부모 반응은 어떤가. 지금 세대가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과 확연히 다를 텐데.
진학을 결정한 부모나 학생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마이스터고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진학한다. 게임을 좋아한다고만 해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실력인데도 게임 개발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학부모 대상 강연도 많이 한다. 게임을 설치할 때 잘 안 된다고 부모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검색하거나 드라이브를 삭제하고 업데이트하면서 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또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중장기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원하는 레벨을 정하고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상하면서 본인이 갖고 있는 자원을 살펴본다. 팀플레이도 돌아본다. 공부만 해서는 알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간혹 중독과 폭력을 우려하지만 게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 권투나 UFC를 보고 따라하며 자란 세대가 다 폭력적이진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아이디어에 놀라는 경우가 많나?
사실 그런 일은 많지 않다. 잘 만들어진 기성 게임을 답습하고 모방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다. 1등은 아니어도 2~3등은 할 거라고 학생들에게 솔직히 설명해준다. 1등은 투박하고 유치해도 기발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해가 지날수록 나아지는 게 보인다.
창의성이 중요하단 의미인데, 점점 나아지는 건 교육의 효과인가?
잘 아는 교수들과 연계해 연구를 진행한다. 또 해외 대학들과 교과 과정을 비교·분석해 반영한다. 취업 실습을 가서는 현장에서 좋았던 점, 부족했던 점을 데이터로 쌓아 교과 과정 개발이나 교육 지침 가이드로 삼는다. 다소 특이한 팀 프로젝트도 한다. 3학년생 70여 명이 한 수업에 모두 들어가 4~5명이 팀을 짜 프로젝트만 수행한다. 팀 프로젝트를 하면서 부서지고 갈등을 겪고 서로 자극을 받는다. 매월 오디션을 보고 평가도 받는다.
진로 관련해 특별히 신경 쓰는 지점이 있나?
학생들의 취업을 목표로 하지만 진학도 같이 지원해주고 싶다. 인재를 키우는 역량을 갖추려면 대학을 나오고 석·박사 과정도 필요하다. 선취업한 학생들이 게임콘텐츠학과에서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게 일부 대학교와 논의 중이다.
7월에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했다. 경기게임마이스터고를 자랑할 기회 아니었나?
‘게임’이 이름 붙은 기관에 대통령이 방문한 첫 사례일 거다. 3학년 학생들이 개발 중인 게임을 윤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또 ‘디지털 기반 학습 및 취업지원 시스템’을 설명했다. 다른 학교는 규격화된 홈페이지를 교육청에서 관리한다. 반면 우리 학교 홈페이지에는 포트폴리오전시관이 있어 학생들이 직접 개인 포트폴리오를 올리고 관리한다. A학생 페이지에 들어가면 그동안의 수상 내역, 만든 게임 등이 나오고 유튜브 링크로 연결된다. 교사가 학습 상황을 확인할 뿐 아니라 기업이 열람하고 관심이 있으면 면접을 요청할 수도 있는 시스템이다.
좋은 개발자가 갖춰야 할 역량은 무엇인가?
어디든 인성과 일하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 화두인 챗GPT를 예를 들어보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은 결국 공감 능력이다. 가령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갖가지 요소들을 고려해 병명과 치료방법을 쭉 보여주는 시대가 올 거다. 이때 의사는 환자가 말하기 어려워하는 부분도 끌어낼 수 있는 문진 능력이 필요하다.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을 점점 중요하게 여기다 보면 결국 인성, 태도, 공감 능력 등이 요구된다. 게임 개발자도 마찬가지다.
선수현 기자
박스기사
마이스터고는?
산업계 수요에 직접 연계된 교육과정 운영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다. 반도체, 원자력, 기계, 로봇 등 학교별로 특화된 교육을 실시한다. 일찌감치 진로를 선택하고 특성화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다수가 졸업과 동시에 진학보다 취업을 선택한다. 2010년 첫 입학생을 받은 이래 현재 전국 54개의 마이스터고가 운영되고 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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