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지원단 6개국 전쟁 한가운데서 목숨 건 진료 전쟁 후 민간 구호까지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본문
고마운 나라, 고마운 사람들 ⑤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독일·이탈리아
정전 70주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22개국(전투부대 파병 16개국, 의료지원부대 파병 6개국)의 젊은이들이 한반도로 모였다. 1129일 동안 치른 전쟁으로 유엔군은 4만 670명이 전사, 10만 4280명이 다쳤고 4116명은 실종, 5815명은 포로가 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1950년 6월 27일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한 달 뒤인 7월 31일에는 ‘한국 민간인에 대한 구호’를 결의했다. 구호 결의에 따라 유엔 회원국은 의료·물자를 지원해 유엔군의 작전과 한국인에 대한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지원단에는 총 6개국(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독일, 이탈리아)이 동참했다.
의료지원단이 남긴 대표적 유산은 서울 중구에 있는 국립중앙의료원이다. 1957년 국립의료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병원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가 협력해 10년 동안 공동 운영하며 우리나라 의료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스웨덴
6년 6개월간 주둔하며 수많은 생명 살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지만 유엔에 의료지원 의사를 가장 먼저 밝혔다. 적십자사를 통해 의사·간호사 등 167명으로 구성한 스웨덴 적십자병원을 편성했다. 의료진은 1950년 9월 14일 부산항에 도착해 옛 부산상업고등학교 터(현 서면 롯데호텔)에 자리를 잡고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이란 이름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병상을 400개나 갖추고 의사 열 명 중 여덟 명은 외과의사여서 후방의 이동 외과병원 역할을 했다.
1951년 중공군의 대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이 큰 피해를 입자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도 바빠졌다.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은 군인뿐 아니라 노무자, 민간인, 적군 포로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치료했다.
1952년에는 어린이 병실을, 1953년 4월에는 결핵환자를 위한 병상을 따로 만들었다. 스웨덴 의료진은 파견 기간이 6개월이었지만 체류 기간을 연장하거나 재파견을 자원한 경우도 많았다. 스웨덴 현지 의사들도 의료봉사를 자원, 자발적으로 한국을 찾아왔다.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은 한국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수많은 중환자의 생명을 살리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부산스웨덴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 진료를 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부산스웨덴병원에 입원하길 원했다. 스웨덴 의료진은 1957년 4월까지 6년 6개월간 한국에 주둔하며 의료지원부대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석 차 한국을 방문한 스웨덴 스카우트 단원들은 8월 13일 부산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우리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한국을 도우러 부산에 오셨다는 사실이 아주 자랑스럽고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인도
공수부대와 함께 침투해 부상병 치료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는 중립국임을 내세웠다. 1950년 6월 27일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 인도는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은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보리가 ‘한국 민간인에 대한 구호’를 결의하자 의료지원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인도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60야전병원을 보냈다. 외과의사 4명, 마취의사 2명, 일반의사 8명 등 총 341명으로 구성된 의료진이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했다. 란가라지 중령이 이끄는 의료진 본대는 전방에서 싸우는 영국군을 지원했고 배너지 소령이 지휘하는 분견대는 대구 지역을 맡았다.
1952년 9월에는 중공군 포탄이 60야전병원 본부를 공격해 의료진 1명이 전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치료를 위한 후송을 거부하고 응급조치만 받은 후 아군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인도 의료진은 전투 요원 못지않게 위험하고 힘든 상황을 겪어야 했다. 인도 의료진은 전황이 급박할 땐 미 공수부대와 함께 수송기를 타고 낙하 침투해 야전 의료소를 만들고 부상병을 치료했다.
60야전병원은 전쟁 기간에 외래수술 2300건을 실시했으며 민간인을 포함해 입원 환자 약 2만 명을 치료했다.
국가보훈부는 ‘2020년 7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란가라지 중령을 선정했다. 25개월간 참전한 그는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고 전장을 누비며 환자를 돌봤다.
덴마크
상선을 해상 종합병원선으로 개조해 파병
덴마크는 한국을 돕기 위해 덴마크 코펜하겐과 미국 뉴욕을 오가던 8500톤급 상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를 병원선으로 개조했다. 1951년 3월 7일 부산에 도착한 유틀란디아호는 병상 356개와 각종 의료시설이 마련된 현대식 해상 종합병원이었다. 이 배에서 덴마크 의료진 100명가량이 활동했다.
유틀란디아호는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다가 전방 지역으로도 이동해 환자를 돌봤다. 유틀란디아호의 가장 큰 문제는 등화관제였다. 등화관제는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명을 켜지 않는 것이다. 병원선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지만 적십자 표시등이 켜져 있을 때만 가능하다. 등화관제를 위해 불을 끄면 병원선으로서 보호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을 켜면 그 근처에서 유엔군이 군사 작전을 하고 있다는 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덴마크 병원선은 등화관제를 적절히 해가며 부상병을 치료했다. 1952년 11월부터는 인천항에 정박해 활동했다. 전선에서 몰려드는 전상자를 치료하느라 바빴지만 육지에서도 어린이병원 진료를 돕고 의약품을 지원했다.
한국에서 치료할 수 없는 부상병을 일본으로 후송하는 역할도 했다. 병원선이 일본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 남은 덴마크 의료진은 휴가를 반납하고 전방 야전병원에서 수술을 지원했다. 유틀란디아호는 높은 의료 수준과 쾌적한 시설로 유엔군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병사 중에는 ‘다치면 유틀란디아로 호송해달라’고 적은 쪽지를 군번줄에 붙여놓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병원선에서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1951년 6월 당시 매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유틀란디아호를 휴전회담 장소로 정하자고 제안했으나 공산군 측이 거부했다. 이 때문에 휴전회담은 판문점에서 열렸다. 유틀란디아호는 교대를 위해 몇 차례 귀국하는 길에 태국, 영국, 벨기에, 튀르키예, 프랑스 등 다른 참전국 부상자와 포로 등을 태워 도중에 내려주는 귀국 지원도 했다.
유틀란디아호는 유엔군사령부에 999일간 배속돼 24개국에서 온 4981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한국 민간인 6000여 명도 돌봤다.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1953년 8월 16일 인천 시민들의 열렬한 환송 속에 덴마크로 향했다.
노르웨이
연인원 623명 파견… 참전기간 수술 9600여회
노르웨이는 적십자사를 통해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노르웨이는 앞서 유엔 안보리에서 군사지원 결의안에 찬성했고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7만 4600달러와 의류 126톤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 유엔 한국재건단에는 172만 5523달러를 기부했다.
1951년 6월 22일 한국에 도착한 노르웨이 의료진 83명은 미 1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경기 동두천으로 이동해 천막 임시건물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60병상 규모로 편성된 이동외과병원(NORMASH)이었다. 노르웨이 의료진은 대부분 서울 북쪽에서 미 1군단에 대한 의무지원을 폈고 경기 의정부를 거쳐 경기 동두천에 주둔했다. 파병 규모는 의사 80명, 치과의사 5명, 간호사 33명 등 연인원 623명이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은 참전 기간 중 크고 작은 수술 9600회를 실시했다. 하루 평균 8번 수술을 했으며 전투가 치열할 때는 하루 64회에 이르렀다. 군인뿐만 아니라 병원 인근에 사는 민간인들도 치료했다. 1954년 10월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1만 4755명, 완치돼 퇴원한 환자는 4317명이었다. 치료 중 사망한 이는 전체 환자 중 1.2%인 150명에 불과해 노르웨이 의료진의 뛰어난 의술을 보여줬다.
의료진은 일부는 자발적으로 한국 근무 기간을 연장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에 있는 민간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주로 민간인을 진료했으며 3년 3개월 동안 활동한 뒤 1954년 10월 18일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독일
전후 복구 중 야전병원 파견, 1959년까지 의료지원
독일은 2018년에야 의료지원국으로 인정받았다. 6·25전쟁 당시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돼 있었다. 자유 진영에 속한 서독은 전쟁이 끝난 뒤에 의료진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전후 복구가 시급했음에도 1953년 4월 7일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야전병원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우리 정부도 서독의 제안에 놀라워 했다. 하지만 각종 절차를 거치느라 1953년 7월 27일을 넘기게 됐다.
서독은 정전협정이 맺어졌음에도 약속을 지키고자 적십자사를 통해 의료진을 지원했다. 서독 의료진은 1954년 1월 한국에 도착한 뒤 부산 서대신동에 있는 부산여고 건물을 인수해 1954년 5월 17일 첫 환자를 받았다. 병원이 문을 열자 새벽부터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가 몰려들었다. 서독 의료진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자 형편이 넉넉한 이들도 서독 적십자병원에서 진료받길 원했다. 질서유지를 위한 진료순서권은 암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다. 환자 상태와 함께 빈곤 상황도 고려해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먼저 챙겼다.
서독 적십자병원은 1959년 2월까지 진료를 계속했다. 5년 동안 외래환자 22만 7250명, 입원환자 2만 1562명을 돌보고 수술도 1만 5857건을 해냈다. 또 신생아 6025명이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2018년에야 우리 정부는 독일의 의료지원 활동에 대한 학계 의견을 모아 독일을 의료지원국에 포함했다. 독일은 진료와 수술뿐 아니라 한국 의사들을 대상으로 임상 수련도 실시하고 간호사 60명을 양성하는 등 의료진 양성사업에도 힘썼다.
이탈리아
유엔 비회원국임에도 의약품 싣고와 의료지원
이탈리아는 6·25전쟁이 일어날 당시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참전국 중 단 하나뿐인 유엔 비회원국이었다. 이탈리아가 파견한 68적십자병원은 60여 명 규모로 편성됐다. 부족한 인력은 한국인을 고용해 해결했다. 대량의 의약품을 싣고 1951년 11월 16일 부산에 입항한 의료진은 1951년 12월 6일 서울 영등포구 우신초등학교에 68적십자병원을 열고 진료를 시작했다.
이들은 전선에서 후송되는 부상자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치료했다. 1952년 9월 17일 서울 구로구 경인선 철로 부근에서 열차 충돌사고(사망 12명, 부상 160여 명)가 나자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161명을 치료했다. 이 중 수술을 받은 중환자 39명은 이탈리아 간호사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수술 후 2개월 안에 대부분 퇴원했다.
이탈리아는 많은 환자를 돌봐야 했기에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에도 1년 더 활동했다. 침상 150개로 시작한 이탈리아 병원은 규모가 200개 병상까지 늘어났다. 입원환자 7041명과 외래환자 22만 9885명이 치료받았다. 당시 민간인 입원 환자의 대부분은 기생충 관련 환자였다. 이탈리아 의료진은 본국에서 구충제를 지원받아 기생충 박멸에도 앞장선 뒤 1955년 1월 2일 귀국했다.
이경훈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