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의 줄리엣을 그리워한 베를리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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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위치한 베로나는 인구 26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아주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매력적인 고도(古都)이다. 이 도시의 기원은 2000년 전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원형극장 아레나(Arena)와 반원형 극장이다. 아레나는 음향이 뛰어나 1913년부터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디제 강 건너 언덕 기슭에 있는 반원형 극장에서는 여름이 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공연되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는 단연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사실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을 유혹한다.
베로나에서는 로미오의 집, 줄리엣의 집, 그리고 줄리엣의 묘소 등, 사랑과 비극의 현장을 볼 수 있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줄리엣의 집은 베로나의 심장 에르베 광장 가까이 비아 캅펠로(Via Cappello)에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줄리엣 동상 앞에서, 또 줄리엣의 발코니 아래에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베로나에 이런 장소들이 있다고 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존 인물이란 뜻은 아니다. 예로 줄리엣의 집은 13세기의 저택을 1900년대 전반에 그럴듯하게 복원한 것이다. 이 집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일 년에 자그마치 150만 명이나 몰려오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줄리엣의 집이 ‘가짜’라는 사실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꿈같은 이야기에서 꿈을 찾을 뿐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사랑의 증거로 줄리엣의 집 벽에 낙서를 남긴다. 별의별 낙서들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서로 얽혀있는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각국어로 쓰인 수많은 사연들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역사적 키치(kitch)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영어로 쓴 낙서가 있는가 하면, ‘줄리엣이여 창가에 다시 나와 사랑의 노래를 불러 다오’라고 스페인어로 쓴 낭만적인 낙서도 있고, ‘줄리엣 그대는 아는가, 나 역시 첫사랑을 밝은 달에게 고백했다네’라고 하는 달콤한 이탈리아어 낙서도 눈길을 끈다.
이와는 달리 다소 냉소적인 프랑스어 표현도 있다. ‘사랑의 기쁨은 단지 한순간일 뿐, 사랑의 아픔은 평생 계속될지니…….’ 사랑의 상처로 고통받은 사람이 쓴 것일까? 만약 줄리엣의 집이 19세기 전반에 복원되어 <환상교향곡>을 작곡한 프랑스의 베를리오즈가 이곳을 방문했더라면 혹시 이런 글을 남기지는 않았을까?
‘관현악의 아버지’ 베를리오즈(H. Berlioz 1803-1869)는 시대를 앞서간 독창적인 낭만주의 작곡가였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셰익스피어는 신과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1827년 9월, 23세의 청년 베를리오즈는 파리에서 영국 극단이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했는데 이 공연은 그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음악적 감성을 단번에 끓어오르게 했다. 게다가 그는 오필리아 역과 줄리엣 역을 맡은 아일랜드 여배우 하리엣 스미드슨에게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베를리오즈는 끈질기게 그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베를리오즈는 <환상 교향곡>을 1830년에 작곡하여 파리에서 초연했다. 그 후에도 그녀는 베를리오즈의 구애를 무시하다가 1832년에 마침내 그의 연주회에 초대받아 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었고 사랑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양쪽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33년에 전격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꿈과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인기 연예인이 아니라 빚에 쪼들리고 있었으니 그녀의 빚까지 떠맡은 베를리오즈는 각박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데 모든 정력을 소모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성격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졌다.
현실에 환멸을 느낀 베를리오즈는 다시 환상의 세계로 돌아가 또 다른 환상 속의 여인을 끊임없이 좇고 있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셰익스피어’라는 ‘신’이 창조한 오필리아와 줄리엣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의 현실 세계는 점점 더 실패와 가난으로 점철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먹구름을 뚫고 밝은 햇살이 비쳤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그에게 선뜻 거액의 수표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히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파가니니의 후원금 덕택에 처참한 현실에 날개가 묶여 있던 베를리오즈는 완전히 해방되어 다시 환상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었다.
그는 파가니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주시간이 장장 140분이나 되는 관현악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1839년에 완성하여 파리 음악원에서 초연했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 독창, 합창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기념비적인 대곡이다. 이 작품에서 베를리오즈는 환상 속에서 꿈꾸던 여인 줄리엣을 만나고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환상 속의 여인이 현실의 여인이 결코 될 수 없었던 것은 베를리오즈에게는 천만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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