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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불 지핀 두 의사의 마지막 흔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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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광복절 78주년
이봉창·윤봉길 의사 유품 특별공개

장소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대한제국실
기간~8월 31일까지
관람료무료
시간월·화·목·금·일 오전 10시~오후 6시
(수·토요일 오후 9시까지)
문의02-2077-9000

‘나는 적성(赤誠·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
1931년 12월, 히로히토 일왕을 저격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봉창 의사(1900~1932)가 남긴 선서문이다. 그가 몸담은 한인애국단의 1호 입단 선서문이기도 하다. 한인애국단은 1931년 김구 선생이 중심이 돼 조직한 단체로 일본의 주요 인사 암살이 임무였다.
이봉창 의사는 이 선서문을 자필로 작성한 후 안중근 의사의 막냇동생이자 한인애국단 임원이었던 안공근의 집에서 선서문을 가슴에 걸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속 이 의사는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
이 의사는 선서문을 작성한 뒤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이후 일본경찰에 체포돼 일본 도쿄법원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2년 10월 10일 순국했다. 향년 32세였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끼쳐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을 촉발시켰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조국 독립을 향한 마지막 숨결을 확인할 수 있는 유품을 특별 공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상설전시실 대한제국실에 전시된 유품은 보물로 지정된 ‘이봉창 의사 선서문’과 ‘윤봉길 의사 자필 이력서 및 유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식 겸 일왕 생일축하 기념식장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윤 의사의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많은 요인이 중상을 입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저항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계기가 됐다.





고종이 하사한 태극기에 담긴 주권의지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비롯해 가족 단위 관람객, 외국인 관람객까지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광복절을 앞두고 특히 대한제국실에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대한제국실 안에는 벽면에 특별한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보물이다. 태극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형태가 다르다. 고종 황제가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 오언(Owen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이다. 데니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며 조선이 주권독립국임을 주장했다. 태극기의 바탕은 흰색 광목 두 폭에 붉은색 천과 푸른색 천을 오려서 바느질했다. 4괘의 형태와 배치는 지금의 태극기와 같지만 검은색이 아닌 푸른색이다. 크기는 가로 262㎝, 세로 182.5㎝에 이른다. 198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데니의 태극기는 후손들의 손을 거쳐 1981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준다. 태극기의 맞은편 벽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얼굴이 보인다.
“윤봉길 의사 하면 뭐가 생각나나요?”
“도시락 폭탄이요!”
단체관람을 온 초등학생들이 인솔자의 질문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인솔자는 아이들의 대답에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가 벌인 의거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두 의사처럼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두 의사의 사진 아래 이봉창 의사가 쓴 선서문, 윤봉길 의사의 이력서와 유서가 있다.







오로지 조국 독립과 자유의지만 담긴 유품
윤 의사의 이력서와 유서는 1932년에 작성된 것이다. 훙커우공원 거사 직전에 공책에 직접 쓴 것이다. 이력서에는 상하이로 가기 전까지 본인의 삶이 요약돼 있다.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거사 전날 훙커우공원을 답사한 뒤 쓴 시, 김구 선생에게 남긴 시 등도 적혀 있다.
이력서에는 본적, 본관, 부모의 이름 등이 적혀 있다. ‘7세에 서당에서 총명하고 재주있다는 말을 들었다’, ‘성질이 남달리 굳세고 조급해 동무들과 다투면 진 적이 없었다’ 등 개인적인 일화가 담겨 있다. 이력서 마지막에는 ‘24세 5월 8일 목적지인 상하이에 상륙했다. 계춘건과 함께 훙커우에서 작은 채소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그 뒤는 여러 선생님들도 아실 것이다’라고 마무리한다.
훙커우공원을 답사한 뒤 적은 시도 눈에 띈다. ‘무성한 어여쁜 풀이여 내년에 봄이 오거든 왕손과 함께 같이 오세’로 시작하는 시는 ‘금년 4월 29일에 한 발의 총소리로 맹세하세’라고 마무리했다. 시에 적힌 금년(1932년) 4월 29일은 윤 의사가 일본군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진 날이다.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는 의거를 앞두고 담담한 심경과 아이들이 독립투사가 되길 당부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는 ‘포대기에 싸인 두 병정에게(아들 모순과 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윤 의사는 ‘너희에게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너희들은 아비 없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작성했다. 스물넷의 나이에 큰 뜻을 위해 두 아들을 떠나는 순간마저도 독립에 대한 의지와 아들들이 반듯하게 자라길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엿보인다.
김구 선생에게 남긴 시에는 ‘저 멀리 서 있는 푸른 소나무여, 사시사철 변함이 없도다’, ‘온갖 어려움 참고 견디니 선생의 붉은 마음이로다’라며 선생의 뜻을 높이 샀다.
두 의사가 남긴 흔적은 이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과 의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대한제국실 입구에는 두 의사와 뜻을 함께한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 쓴 글이 적혀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뜻과 열망은 광복으로 이뤄졌다. 광복 후 78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뜻은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두 의사의 이야기가 담긴 유품은 8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가현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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