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라마 보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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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유치원 꼬마를 데리고 영화관 구경을 갔는지 모르겠다. 당시 시골의 오락거리라고는 영화관 구경밖에 없었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이지 않았을까 싶다. 다섯 살의 영미는 엄마 손에 이끌려 무수한 성인영화를 봤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문희·신영균 주연으로 아이를 낳은 후처가 울며 쫓겨나는, 그런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문희의 눈물 장면에 다섯 살 어린아이가 무슨 서러움을 안다며 같이 울었는지.
조금 크면서는 엄마 없이 친구들이나 혼자 영화 구경을 갔다. 최인호 원작에 이장호 감독 연출, 안인숙·신성일 주연의 <별들의 고향>도 초등학교 시절 나의 정서를 자극한 영화였다. 신성일이 느끼한 성우의 더빙으로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이라고 말하면 안인숙이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한다. 나의 첫 번째 간접경험 연애감정이었다. 아마도 사춘기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그 후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 <무릎과 무릎 사이>를 지나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적도의 꽃>, <기쁜 우리 젊은 날> 등 나의 청춘은 영화를 빼놓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당연히 드라마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드라마 다시보기, 다운로드, 스트리밍,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일상화됐지만 그 시절엔 텔레비전 일정표가 매일 아침 신문에 실렸다. 나는 아예 그 일정표를 가위로 오려 책상 위에 두고는 좋아하는 드라마를 챙겨봤다. 어쩌다 본방송을 놓치면 방송국에 여러 통의 전화를 걸어 각각 다른 목소리로 그 드라마 재방 좀 해달라며 간청한 적도 여러 번이다. 녹화 테이프가 나온 뒤로는 엄마에게 부탁해 테이프에 녹화까지 해놓고 직직거리는 화면을 보고 또 봤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가 극적인 시청률을 기록할 당시, 일본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LG 야구선수 동계훈련에 가게 됐는데 직접 녹화한 <모래시계> 테이프를 가져가 선수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 드라마에 종종 아나운서 역할이 필요할 땐 내가 손 번쩍 들어 즐겁게 연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온갖 OTT 플랫폼 채널에 가입하고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본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오징어게임>, <미스터 션샤인>, <헤어질 결심>, <더 글로리>, 최근에는 <퀸메이커>까지. 요즘엔 10여 편이 한꺼번에 공개되니 거의 식음을 전폐하거나 몇 날 며칠 눈이 벌겋게 돼서 드라마에 매달리기도 한다.
우리 엄마도 저녁 드시고 소파에 누워 일일드라마를 보시다 곧잘 잠이 드시곤 했다. 내가 “엄마, 들어가 주무세요” 하면 “누가 잤다 그래, 나 안 잤다” 하시고는 스르르 주무시곤 했는데 지금의 내가 딱 그렇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이 깼을 때 다시 돌려보기를 하다가 다시 또 잠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늦은 밤 소파에서 영화·드라마를 볼 때다. 드라마엔 인생이 다 담겨 있다. 보면서 나의 인생, 너의 인생, 우리의 삶을 보게 되고 때론 삶의 지혜와 해답이 거기에 있다. 또 사랑이 있다. 나의 지난 첫사랑과 다가올 끝사랑. 이병헌, 손석구, 박해일, 조승우, 그리고 이성민.
윤영미
SBS 아나운서 출신으로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다. 현재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산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제주 무모한집을 소개하며 뉴미디어를 향해 순항 중인 열정의 소유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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