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낮춰 참전하고 부상 딛고 또 참전 그들의 희생이 방어선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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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나라, 고마운 사람들③
프랑스·튀르키예·네덜란드·그리스·벨기에·룩셈부르크
정전70주년
6·25전쟁이 나자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를, 6개국이 의료지원단을 파병했다. 1129일 간의 전쟁에서 유엔군은 4만 670명이 전사, 10만 4280명이 다쳤고 4116명은 실종, 5815명은 포로가 됐다.
프랑스
전쟁 영웅 몽클라르 장군 네 계급 낮춰 참전
육·해군 3421명 파병
(262명 전사, 1008명 부상, 실종 7명, 포로 12명)
북한이 남침한 뒤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 프랑스는 유엔군 파병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피해를 당해 전후 복구가 한창이었기에 한국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군함을 한 척 파견한 프랑스는 지상군을 파병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퇴역 장군 마그랭 베르느네가 나서 “제2차 세계대전 경험자로 부대를 편성하고 지휘관을 맡겠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전역을 돌며 베테랑 지원병 1300명을 모집했다. 문제는 프랑스 지상군의 규모가 대대급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에 베르느네는 중장 대신 중령으로 계급을 네 단계나 낮춰가며 참전했다. 그의 군 경력은 당시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과 비슷했다. 중령으로 참전한 베르느네는 사실 프랑스의 전쟁영웅 ‘몽클라르’ 장군이었다.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됐을 때 저항군으로 활약하던 베르느네는 몽클라르라는 가명을 썼다. 그는 18번이나 다쳤지만 40여 회나 훈·포장을 받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프랑스 지상군은 1950년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열차를 타고 같은 해 12월 11일 경기 수원으로 이동해 미 2사단에 배속돼 전투를 치렀다.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라는 명목으로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을 보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1951년 1월 4일(1·4후퇴)에는 오산~영월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밀려났다.
1951년 2월 프랑스군은 지평리전투(경기 양평)에서 중공군을 격퇴해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프랑스군은 중공군이 진지 20m 앞까지 접근하자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철모를 벗고 이마에는 빨간 수건을 동여매고 백병전을 벌였다. 사흘 동안 전투를 치르며 끝내 중공군을 무찌르고 진지를 지켜냈다. 지평리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을 이긴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로 유엔군은 중공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지평리전투 승리의 배경에는 군 경력 52년에 이르는 몽클라르 장군의 탁월한 지휘가 있었다.
프랑스 의무대장 쥴 장 루이 군의관은 지뢰를 밟은 국군 장병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1951년 5월 8일 강원 홍천군에서 국군 장병 2명이 지뢰를 밟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험한 지뢰밭을 헤치고 들어가 구출했지만 쥴 장 루이는 중공군이 매설한 지뢰를 밟고 34세에 전사했다.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프랑스 전사자 중 47명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튀르키예
백병전의 강자, 전후 학교·학원·보육원 세워
육·해군 2만 1212명 파병
(966명 전사, 1155명 부상, 포로 244명)
튀르키예군은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인명 손실을 봤다. 미국·영국을 제외하고 지상군을 여단(4000~5000명) 규모로 파견한 나라는 튀르키예와 캐나다뿐이다.
1950년 9월 25일 튀르키예에서 떠난 튀르키예군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같은 해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첫 전투는 도착 한 달 뒤 치른 평양 군우리전투였다. 미 2사단이 청천강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해 철수할 때 튀르키예군은 미군을 구하기 위해 중공군 진지로 돌격해 백병전을 벌였다. 덕분에 미 2사단은 중공군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튀르키예군은 군우리전투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봤다.
튀르키예군은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25일부터 사흘간 치른 김량장전투(경기 용인)에서도 맹활약했다. 유엔군이 공군·포병으로 중공군을 타격하면 튀르키예군은 “알라(Allah)”를 외치며 돌격해 육탄전을 벌였다. 김량장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12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다쳤지만 중공군은 사상자가 1735명이나 생겼다. 튀르키예 군인 한 명당 40명의 적을 무찌른 셈이다. 중공군은 김량장전투 이후 일선에 “튀르키예군과는 정면승부를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김량장전투는 튀르키예군이 앞서 치른 군우리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튀르키예군의 명예를 회복한 전투였다. 유엔군은 김량장전투 승리를 계기로 중공군의 남진을 늦추고 반격 계기를 마련했다.
1952년 튀르키예군은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튀르키예 수도 이름을 딴 ‘안카라고아원(앙카라학원)’을 경기 수원에 세웠다. 전후 튀르키예 잔류 부대가 철수한 1966년까지 14년 동안 전쟁고아 640여 명을 돌봤다. 술레이만 하사와 전쟁고아 김은자 씨 사연이 대표적이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튀르키예군 전사자 462명이 안장돼 있다.
네덜란드
횡성을 지켜낸 풍차의 나라 군인들
육·해군 5322명 파병
(120명 전사, 645명 부상, 포로 3명)
전황이 나빠지자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회원국에 지상군 파병을 요청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난색을 보였지만 네덜란드 국민이 나서 ‘한국참전지원병임시위원회’를 만들었다. 결국 정부는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대대급 지상군(636명) 부대를 편성했다. 1950년 11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한 네덜란드군은 급박한 전황 때문에 현지 적응 훈련도 마치지 못한 채 미 2사단에 배속돼 싸웠다. 주 임무는 전선 후방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중공군 방어였다.
1951년 2월 중공군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대공세를 벌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엄호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으로 위장한 중공군이 네덜란드군을 기습해 포위했다. 오우덴 중령은 대원들을 지휘하며 적에게 저항했으나 수류탄 폭발로 전사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포함해 15명이 전사했음에도 네덜란드군은 중공군의 기습을 방어하고 철수하는 유엔군을 끝까지 엄호했다. 네덜란드군의 활약 덕분에 유엔군은 중공군을 저지하고 반격해 전선을 38선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
네덜란드는 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하다. 전쟁 기간 군함 6척을 파견했다.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공산군 병력과 보급 물자를 함포사격으로 타격했고 인천상륙작전도 도왔다. 네덜란드군은 정전협정 이후에도 벙커와 지뢰 등 휴전선 근처의 방어 시설물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전후 복구를 도왔다. 1954년 10월까지 한반도에 주둔한 네덜란드군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들러 네덜란드군 전사자의 묘지에 참배한 후 탄약통에 ‘한국의 흙’을 담아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흙은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 기념탑 아래 묻혔다. 6·25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이 격전을 벌여 가장 큰 피해를 본 강원 횡성에는 네덜란드군 참전비와 오우덴 중령을 기리는 현충비가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네덜란드군 124명(사후 안장 포함)이 안장돼 있다.
그리스
아테네의 후예, 정전 하루 전날까지 고지 사수
육·해군 4922명 파병
(192명 전사, 543명 부상, 포로 3명)
경기 여주시에는 그리스군의 참전과 희생 장병을 기리는 참전비가 있다. 마치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을 연상케 한다. 그리스가 파병을 결정한 배경에는 그리스도 내전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는 공군을 먼저 파견했다. 1950년 12월 1일 그리스에서 출발해 60시간가량 이동한 그리스 공군은 미 공군에 배속돼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4000회가량 출격해 병력과 장비, 물자 등을 실어 날랐다. 장진호전투에서는 중공군에 고립된 미 해병대원을 지원하기 위해 보급품을 수송하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후송했다.
1950년 12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한 그리스 지상군(1개 대대)은 미 1사단에 배속돼 1951년 1월부터 충북 충주 지역에 숨어든 공산군 패잔병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해발 1000m가 넘는 눈 덮인 산세에도 그리스군은 거침없었다. 이미 그리스 북부 산악 지대에서 공산군을 토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군은 정전 하루 전까지도 맹렬히 싸웠다. 강원 철원군 부근 북정령고지전투에서 그리스군은 미 3사단에 배속돼 중공군과 싸웠다. 중공군은 휴전을 앞두고 휴전선 이남 지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 마지막 공세를 펴고 있었다. 이에 미군은 휴전을 앞두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리스군에 북정령고지 일대에서 철수하라고 종용했으나 그리스군은 추가 화력지원을 요청하면서 방어선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 결과 승암고개가 휴전선 남쪽에 남아 있게 됐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 19명이 전사하고 사상자 28명이 발생했다. 그리스군은 강원 철원 313고지전투, 노리고지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두 나라가 모여 하나의 군대로 파병
벨기에
육군 3498명 파병
(99명 전사, 336명 부상, 1명 포로)
룩셈부르크
육군 100명 파병
(전사 2명, 부상 13명)
베네룩스(Benelux) 동맹으로 영세중립국을 선언했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두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팽창을 겪으며 1949년 영세중립국을 포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과 미국으로부터 참전요청을 받은 벨기에·룩셈부르크는 양국 군대가 통합된 지상군 대대(900명)를 편성해 파병하기로 했다. 참전 요청을 받기 전만 해도 이 두 국가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룩셈부르크는 유엔참전국 중 가장 작은 나라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유엔에 ‘참전 희망 국가는 최소 1000명을 파병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룩셈부르크는 이 기준에서 예외였다. 인구 20만 명인 룩셈부르크는 많은 병력을 파병할 수 없어 인접국인 벨기에와 협력해 1개 소대 병력(48명)이 참전하게 됐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도착했다. 1951년 3월 6일에는 경기 수원으로 이동해 미군 3사단에 배속됐다. 3일 뒤인 3월 9일에는 한강에서 공산군과 처음 교전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군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파주 임진강 유역과 강원 철원 지역에서 중공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국을 재방문한 룩셈부르크 참전용사 레옹 모아엥(92) 씨는 7월 2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윤 대통령에게 “철원에서 싸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관통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전선으로 갔던 모아엥 씨에게 “어떻게 그렇게 용기있게 두 번이나 참전을 결심하게 됐느냐”고 물으며 존경심을 표했다.
김화지구전투에서는 벨기에군 형제 장교 중 한 명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형 피에르 가일리 대위는 교대를 위해 귀국했다가 다시 한국에 파견됐다. 돌아온 그는 동생 에티에느 가일리 대위가 지휘하던 부대를 맡았다. 경비행기를 타고 정찰을 하던 도중 적의 공격으로 항공기가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피에르 가일리 대위는 실종돼 전사 처리됐다.
벨기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을 위해 여러 사회 사업을 펼쳤다. 한센병 환자 전용 병원인 다미엥 병원을 세웠고 환자 자녀들을 위한 직업학교도 만들었다. 1965년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소록도 병원에서 벨기에 의료진이 진료활동을 했다. 그때 한국에 온 벨기에 간호사 중 한 명은 김화지구전투에서 전사한 가일리 대위의 동생이었다.
이경훈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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