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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되찾아준 전쟁영웅들 생생한 얼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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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영웅 특별 사진전’

유엔평화기념관
주소
부산 남구 홍곡로320번길 106
문의 051-901-1400
운영 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무)

6·25전쟁영웅들이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 70여 년 만에 돌아온다. 국군·유엔군 참전용사 흑백사진에 인공지능(AI) 얼굴 복원과 안면 복원 기술을 적용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열리는 ‘6·25전쟁영웅 특별 사진전’에서 고해상도 컬러사진으로 변신한 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지켜낸 전쟁영웅을 기억하고 보훈문화에 대한 국민 공감대 확산을 위해 마련됐다.
전시 대상은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과 ‘이달의 6·25전쟁영웅’ 중 채택된 국내외 참전용사 70명으로 대한민국 자유 수호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부자(父子), 백선엽 장군, 김두만 공군 대장 등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이밖에도 마거릿 히긴스 미국 종군기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 미국 육군 일병, 영화 <아일라>의 실제 주인공 슐레이만 딜빌리이 튀르키예 육군 하사 등이 포함됐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추진한 전시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헌신한 국내외 영웅들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어서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이번 전시를 통해 이분들이 국민과 미래세대들에게 잊히지 않는 불멸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선수현 기자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한미연합사령부·국가보훈부 공동 선정)



김영옥
미 육군 대령. 재미교포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의 나라를 구하겠다”며 미군 예비역 대위로 자원입대했다. 구마산·탑골·금병산전투에 참전했다. 그가 이끈 부대는 유엔군 중 38도선 인근 전술선에 가장 빠르게 도달했다. 휴전선을 60㎞ 북상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한국·미국·유럽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6·25전쟁 이후에는 고아원을 세웠다.


백선엽
6·25전쟁 발발 5주 만에 북한군은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백선엽의 국군 제1사단은 칠곡을 중심으로 총력 방어를 전개했다. 칠곡 인근 낙동강 전선에서 8월 한 달간 벌어진 다부동전투는 6·25전쟁 전체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로 꼽힌다.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무기에도 미8군의 도움을 받아 이곳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남긴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고 가라”는 말은 결연한 전투 의지를 보여준다.


김두만
6·25전쟁 발발 당시 한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달성했다. 개전 초기 우리 군의 서울 탈환과 평양 입성에 기여했다. 미 공군이 500회 출격으로도 폭파하지 못한 승호리 철교를 저고도 폭격으로 14회 만에 폭파한 전공을 세웠다. 적의 후방 보급 요충지를 차단한 성과를 거둔 것. 공군사관학교장,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작전사령관 등을 거쳐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김동석
미8군 정보 연락장교로 1950년 9월 서울탈환작전에 결정적인 적군 정보를 수집해 유엔군사령부에 제공한 공을 세웠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유엔군 내부에서 국군이 큰 신뢰를 얻도록 기여한 인물이다. 맥아더 장군은 ‘This Man’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첩보작전과 야전에서 많은 공적을 세워 미국 정부가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 칭호를 부여받았다. 가수 진미령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박정모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던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하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박정모는 서울탈환작전 시 소대원을 인솔해 시가전을 전개했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피탈된 지 92일 만에 당시 정부청사였던 중앙청에 인공기를 걷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원산상륙작전, 화천댐 탈환작전, 가리산지구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6·25전쟁 초기 북한군이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전황을 뒤바꿨다. 미국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그는 작전을 전개했고 성공을 거뒀다.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사관학교장, 최연소 육군 소장·참모총장 등 군의 주요 지위를 거쳤다. 군직을 떠나는 고별사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오직 사라질 뿐”이란 말을 남겼다.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도쿄로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에도 굴하지 않고 전선을 지킨 명장이다. 한국군 현대화와 미국 원조에 적극 공헌하며 평생 한미관계 발전에 헌신했다. 밴 플리트 부자는 2대에 걸쳐 한국을 수호했는데 외아들 밴 플리트 2세는 6·25전쟁에서 B-26 폭격기를 몰고 작전을 수행하던 중 실종됐다. 최고 사령관인 아버지가 아들을 특별 대우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낸 솔선수범 사례로 꼽힌다.


윌리엄 해밀턴 쇼
인천상륙작전 정보장교.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미 해군에 재입대했다. 그가 치열한 전장으로 달려온 것은 한국을 사랑하는 각별한 마음 때문이다.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그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었다. 한국어와 지리에 능통했던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으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총을 맞고 28세에 전사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인물로 손꼽힌다.


딘 헤스
한국 공군의 대부. 1950년 7월 한국에 도착해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양성 훈련을 포함해 250회에 걸쳐 전투 출격했다. 한국 공군의 P-51D 머스탱 18번기에 ‘신념의 조인’을 새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1·4후퇴 때는 서울의 전쟁고아 1000여 명을 제주도로 피난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고아들을 돌보고 20년간 전쟁고아 후원금을 모금했다.


랄프 퍼켓 주니어
미 육군 제8군 유격중대 중대장. 1950년 11월 청천강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205고지 점령 때 수류탄에 맞고도 중공군에 맞서 활약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대원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남겨두고 떠날 것을 명령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진지를 사수하며 자신의 안위보다 대원들의 안전을 먼저 살핀 일화는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보여준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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