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가 제안한 복싱의 활성화와 챔피언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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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를 활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활 방식은 인류의 삶과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스포츠의 작동원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목이 자본주의 발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화되어 왔다. 프로복싱은 이러한 논리에 가장 부합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스포츠다. 프로모터-선수-팬으로 이어지는 3각 구도가 100년 이상 지속되었고 단 두 사람의 승부를 위해 큰 비용을 지출한 후, 그보다 더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논리 그대로다.
초현실의 밑받침
시간을 102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921년 7월 2일 뉴욕 근교 저지시티에서 열린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이 경기는 프로복싱의 역사를 바꾼, 순도 100%의 옥탄가 높은 매치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를 가리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광고문구)를 내걸고 대전을 주선하고 기획하는 복싱 프로모터인 텍스 리카드(Tex Rickard)는 당시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잭 뎀프시(Jack Dempsey)에게 오퍼를 넣는다. 계약서 하단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30만 달러(한화 약 300억 원)의 대전료를 지급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나사의 암살자’라는 애칭으로 맹위를 떨치긴 했지만, 기껏해야 5∼6만 달러(한화 약 50~60억 원) 정도의 몸값을 받던 그에게 신의 계시가 내린 것이다. * 1920년대 당시 환율 가치: 1달러 = 10만 원
텍스 리카드는 한 체급 아래의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조르주 카르팡티에(Georges Carpentier)에게도 전문을 보내 20만 달러(한화 약 200억 원)의 대전료를 제시한다. 조르주 카르팡티에의 미끈하게 빠진 외모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용맹을 떨친 이력 등이 흥행의 플러스 요인이었다. 승리하면 2체급 석권이라는 보너스도 있었다. 그런데 경기날짜가 다가올수록 대전할 당사자들의 기사는 다루어지지 않고 경기를 주최한 인물이 뉴스의 중심이 된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입찰가와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이벤트가 과연 실현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언론의 의문 때문이었다.
문제 제기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텍스 리카드는 복싱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과거 3~4차례 타이틀매치를 주최한 것도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헤비급 챔피언 벨트는 싸구려가 아니다. 가치를 끌어올리는 방법은 결국 돈이다. 경기가 끝나면 복싱계의 모든 종사자가 나에게 고마워할 것이다.”라고 받아칠 뿐이었다.
주위의 회의적인 시각과는 달리 날개 돋친 듯 티켓이 팔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전례 없던 일이었다. 이때부터 텍스 리카드는 판을 더 키우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돈을 빌리러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복싱 최초로 라디오 중계가 결정되더니, 상징적인 의미로만 부여되던 헤비급 타이틀에 WBA(World Boxing Association/세계복싱협회)의 전신인 NBA(National Boxing Association/전미복싱협회)가 정식으로 대전 승인서를 발송하여 외견상으론 세기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어찌 보면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프로복싱을 세상의 중심으로 그것도 달러 뭉치를 주렁주렁 매달아 등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경기 두 달 전, 일찌감치 도전자인 조르주 카르팡티에가 대서양을 건너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텍스 리카드는 보일의 30 에이커라고 명명된 91,613석의 경기장조차 완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사비 25만 달러(한화 약 250억 원)를 추가로 투입해야 할 상황이었다. 타이틀매치의 제반 경비만 최소 100만 달러(한화 약 1,000억 원)였다. 소떼를 몰던 카우보이 소년에서 골드러시(Gold Rush)에 편승한 광산주로 도박장까지 운영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텍스 리카드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때마다 “내용물이 무엇이든 매력적인 상품은 팔린다. 단 포장은 내 몫이다.”라는 입장을 밝혔고 군중들의 기대심리를 교묘하게 촉진시켜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 발상의 전환이 결국 프로복싱이라는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당긴 것이다.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사상 첫 밀리언 달러 파이트로 기록된 이 경기에서 도전자인 조르주 카르팡티에는 날카로운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기세를 올렸다. 초반 2개의 라운드에서는 명백한 우세였다. 챔피언인 잭 뎀프시의 오른쪽 무릎이 앞뒤로 흔들릴 만큼 빠르고 강렬했다. 이와는 반대로 상체를 웅크린 채 전진 스텝을 밟은 잭 뎀프시는 위력적인 라이트 훅을 여러 차례 휘둘렀으나 유효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눈에 봐도 잭 뎀프시와 체격 차이가 났던 조르주 카르팡티에는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밖에 돌파구가 없었다. 7kg의 체중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한 방 걸리면 끝날 것 같은 아찔한 상황이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결국 4라운드, 외곽을 돌다 잭 뎀프시의 좌우 연타에 걸린 조르주 카르팡티에는 링 바닥으로 추락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짧은 레프트 훅이었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이었다.
혁신의 여파
12분이 채 못 되는 시간이었지만 경기의 밀도는 높았다. 링 사이드를 포함하여 8만 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찼고, 180만 달러(한화 약 1,800억 원)에 육박하는 기록적인 흥행 실적도 올렸다. 그날 그 시간에 저지시티에 거주하는 모든 남자들이 거기 있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텍스 리카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영화관에 필름을 팔아 현장에서 보지 못한 팬들에게 스크린을 통한 유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얼마 후 탄생할 복싱 중계 시대의 개막을 예고한 것이다. 단번에 흥행의 마술사로 불리게 된 텍스 리카드는 이 경기 후에도 100만 달러(한화 약 1,000억 원) 이상의 실적을 올리는 이벤트를 연이어 개최했다. 이젠 밀리언 달러 파이트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장마당에서 좌판을 벌여 경기를 팔던 프로복싱을 단번에 백화점에 진열된 명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물론,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리던 사나이들에게 기회라는 꿈도 심어주었다. 이는 곧 프로복싱을 공급하고 소비하는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버는 그야말로 혁신을 이루어 낸 것이다.
침체라는 말조차 거론하기 민망할 정도로 몰락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란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탁류다. 과거에는 옳은 방식이 세월이 지나면 다른 결과가 되기도 한다. 이젠 우리도 선수와 지도자가 주인이라는 고립된 사고에서 벗어나 경기를 개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프로모터들에게 문을 열어야 한다. 이들은 복싱계 밖에 있다. 더 이상 객이 아닌 손님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기 없는 프로복싱에 누가 투자하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경기 이후 경제 대공황이라는 직격탄을 맞았음에도 프로복싱은 천연두보다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자본주의 이론에 포화라는 개념은 허상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멋진 상품은 언제든 팔릴 수 있다. 복싱계의 비주류였던 텍스 리카드가 기획하고 실행했던 일들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지탱해 왔듯이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여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 그 답은 프로복싱을 소비하는 구매자들의 기호를 파악하는 데 있다. 프로복싱이라는 무대에서 그들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주인공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발행하는 <스포츠 현안과 진단> 134호에 게재된 기고문 입니다.
*이번 호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과학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밝힙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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