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은 나! 나다운 연기가 최고의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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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뇌병변장애인 배우 하지성
2023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예고 없이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다. 연극부문 연기상을 받은 배우 하지성이다. 지난 4월 28일 인천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어느 때보다 큰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나라에서 뇌병변장애인 최초로 연기상을 받은 배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성이 무대에 올라 수상소감을 말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휠체어를 탄 그의 입보다 마이크가 훨씬 높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제작진이 별도로 건네준 마이크를 손에 들고 소감을 말해야 했다.
수상소감은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저는 <틴에이지 딕>에서 리처드 역을 맡은 배우 하지성입니다”라고 말문을 뗀 하지성은 “2분 안에 말해야 하는데 장애를 이용해서 1분만 더 쓰겠다”며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많은 대사량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일, 연기의 어려움을 담담하게 토로하던 하지성은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께 한마디 하겠다”며 “이것도 현실이에요”라고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비장애인 연기에만 초점이 맞춰진 환경에서 장애인 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비장애인 배우도 오르기 힘든 국립극장 무대에 주연으로 올라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거머쥔 하지성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 이런 ‘현실’을 예상했을까? 하지성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저 말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고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게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하지성은 틀을 깨는 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연기상을 수상하게 해준 작품 <틴에이지 딕>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뇌성마비 고등학생의 이야기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장애인인 주인공 리처드가 학생회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여 벌이는 음모와 갈등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으레 장애인이란 선하고 수동적인 약자로 그려지기 마련인데 <틴에이지 딕>의 리처드는 그 고정관념을 깬 인물이다. 야심찬 목적을 가지고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파국으로 이끈다.
리처드와 같이 입체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도전이었을 것 같다.
우선 대사량이 많았다.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정확하게 대사를 전달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연습을 무척 많이 했다. 쉬는 시간에도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상대 배우와 대화하며 대본을 외웠다.
처음부터 리처드를 악한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단정 짓지 않고 연기를 시작했다. 연구하고 반복해서 연기하면서 점차 리처드가 어떤 인물인지 틀을 잡아나갔다. 리처드가 악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공연을 시작하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리처드가 우리가 생각하는 ‘선하고 약한 장애인’이 아니라 강한 욕망을 가지고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연기했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TV가 나의 친구였는데 방송을 보면서 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꿈을 꿨다.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같은 꿈을 가진 장애인 형을 만났다. 그 형이 “장애인 극단에서 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해줘 처음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 전에는 배우라는 꿈을 꾸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뻤다. 실제로 연기를 하는 장애인을 만나면서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연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만 하게 됐을 무렵 한 공연의 오디션을 보게 됐다. 장애인 극단이 만들어져 처음 무대에 올리는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주연으로 발탁됐다.
실제로 연기를 해보니 어땠나?
힘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려니 주변의 도움 없이는 하기 어려웠다. 대사를 외우는 방법, 역할을 분석하는 방법 같은 것을 일일이 물어보며 연습해야 했다. 걱정도 됐지만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으로 한번 해보자, 작품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알아가며 연습하자,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두 번째 공연인가, 무대를 마쳤을 때 관객에게 팬레터를 받았다. 공연을 잘 봤다며 사인 요청을 했다. 만들어둔 사인도 없어서 당황했지만 연기를 계속할 힘을 얻었다. 내 연기가 다른 사람에게 가 닿는구나, 감동이었다.
장애인 배우의 연기법은 비장애인 배우의 것과 다른가?
배우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대본을 익히는 속도, 표현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다.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 다른 배우와 어우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장애인 연기가 비장애인 연기와 다른 점은 없다. 그러나 차이도 있다. 비장애인 배우가 중심인 환경에서 어떻게 몸을 쓰고 목소리를 내는지, 그 차이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많지 않다.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설 때도 많을 것이다.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맞춰나가나?
나는 대화를 많이 하면서 연기를 정하는 편이다. 많이 계획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한다.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상대방과 대화하고 공유한다.
배우마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단순히 역할을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배우의 속도, 방식을 이해하고 호흡하는 것도 포함된다. 장애인 배우가 비장애인 배우와 함께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대화와 연습을 통해 비장애인 연기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 그건 장애를 떠나 배우라면 해야 할 일이다.
배우 하지성은 어떤 연기를 하는 연기자인가?
본래 성격은 좀 내성적이다. 그런데 무대에서는 달라진다. 에너지가 있어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발음이나 몸짓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쓰는 편이다. 속에 있는 감정까지 다 꺼내서 최대한 많이 표현하려고 한다. 어느 한 가지 역할에 집착하기보다 다양한 역할을 맡고자 한다.
다만 즉흥적인 연기는 좀 약하다. 원래도 연습을 많이 하고 분석하고 연기하는 편이라 즉흥적인 연기는 익숙하지 않다.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하다.
연기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나?
2020년 내가 소속된 극단 애인에서 직접 창작한 작품으로 ‘1인 무대’를 선보인 적이 있다. <여기에 있다-배우편>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배우라는 직업과 연기활동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이 ‘목표’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말했던 것이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고 싶다’였다.
3년이 지나 백상예술대상 후보로 지명됐다는 이메일을 받고 너무 놀랐다. 후보로 오른 것만으로도 진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상식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실제로 시상식장에 가보니 유명한 배우들이 가득 와 있는데 영광스러웠다. 수상자로 호명됐을 때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때의 기분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 이것도 현실이에요’라는 수상소감은 어떤 의미였나?
배우 일을 시작할 때 가족들은 말리는 편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원했다. 배우라는 직업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데 아버지는 그걸 늘 염려했다. 현실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현실’은 매일 8시간 근무하는 회사원이 아니라 무대 위에 있는 배우라는 것을 아버지께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 부모님이 많이 인정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가족도 만류하던 배우를 계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연기가 안 되면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과 대화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데는 원인이 있다. 원인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계속 물어보고 대화했다. 결국 소통에서 힘을 얻었다. 그게 내가 배우가 되려고 했던 이유고 배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다.
하고 싶은 작품이나 함께 하고 싶은 배우가 있나?
배우로서 강렬한 역할을 맡아보고도 싶지만 원래 좋아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다. 소통하고 어울려 사는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장애를 어떤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연극 무대뿐 아니라 TV 드라마, 영화에도 관심이 있다. 배우 이성민과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드라마 <미생>을 봤을 때부터 팬이 됐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마주쳐서 너무 기뻤다.
롤모델은 누구인가?
나다. 사실 장애인 배우가 몇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롤모델을 나라고 한 것에는 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장애인 배우지만 장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비장애인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는다. 비장애인 배우처럼 표현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합해서 ‘나다운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 내가 본받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롤모델은 나다.
김효정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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