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만 권의 책, 25만 번의 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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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된 카를 라거펠트는 패션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1964년 ‘클로에’를 시작으로 ‘펜디’와 ‘샤넬’에 이르기까지 55년을 명품계의 수석디자이너로 일하며 패션계를 이끌었다. 그는 어디에서든 디자인을 혁신하고 제품의 성장을 주도해가는 능력과 품격을 보여줬다. 디자이너뿐만이 아니었다. 모델, 성우, 아나운서, 사진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과연 그가 어떻게 일과 휴식의 균형을 조율해나갔을지가 궁금해진다. 일을 잘하기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바쁜 일과 속에서 충분한 휴식 시간을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조율의 단서를 그가 남겨놓은 위대한 유산, ‘라거펠트의 서재’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거펠트는 책에서 자신의 예술적 영감이 나온다고 말하던 독서광이었다. 서재에 대략 25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웬만한 대학 도서관과 비슷한 규모였다. 규모만큼이나 서재를 돋보이게 한 건 공간의 스타일이었다. 흰색으로 칠해진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책들이 세로가 아닌 가로로 눕혀져 쌓여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색색으로 출렁거리는 무늬처럼 보였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책 속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생각들을 노트에 스케치하며 아침 시간을 보냈다. 서재는 스케치한 디자인으로 만든 옷을 모델에게 입히고 촬영하는 스튜디오로 쓰이기도 했다. 외부 일정이 끝난 뒤에는 파티에 가기보다 서재에 돌아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곳도 이곳이었다. 쉬면서도 손을 뻗으면 닿는 책들이 있었기에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나 생각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기에도 좋았다.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단편적인 지식과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깊이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서재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주는 최고의 장소였다.
성장의 열망 속에 속도감 있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균형이 무너지기 쉽다. 남들보다 한발이라도 앞서고 싶은 욕망을 좇다 보면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과열된 속도로 뛰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주하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극도의 피로와 함께 공허함과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워커홀릭(일벌레)으로 유명했던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이나 케이트 스페이드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도 우울함이 원인이었다. 라거펠트 역시 자기 삶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과속을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를 찾았을 것이다. 나는 그 브레이크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꾸며놓은 서재에서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25만 권의 책은 그가 밟아야 했던 25만 번의 브레이크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면 그만큼 충분한 휴식의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해주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의 끝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마라톤처럼 긴 삶의 여정을 무사히 완주하기 위해서는 노력의 열정만큼 적극적인 휴식의 돌봄이 있어야 한다.
신기율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인드풀링(Mindfuling) 대표이자 ‘마음 찻집’ 유튜브를 운영하며 한부모가정 모임인 ‘그루맘’ 교육센터장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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