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성지 백악산 능선 15발 총탄 맞은 소나무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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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경복궁 주변을 걷다가 깜작 놀란 게 10분이면 걸어서 4개 동을 지나가.”
2022년 방영한 한 종편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다. 궁궐 주변이니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왔다는 얘기다.
또 전남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벼슬하거든 빨리 높직한 언덕에 셋집을 얻어 살며 처사의 본색을 잃지 마라. 벼슬을 못해도 서울에서 살며 문화 보는 눈을 유지해라. 내 지금 죄인 명부에 올라 있지만 계획은 서울로부터 10리 안에 사는 것이다. 집안이 기울어 도성 안에서 살 수 없다면 근교에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으로 들어가라.”
권력과 돈의 흐름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경복궁과 청와대 동쪽에는 한양 최고 경승이라는 삼청동과 팔판·소격·화·사간·송현·안국동이 있다. 조선시대 힘깨나 쓰던 사대부들이 살던 동네다. 팔판동은 판서 여덟이 살았대서 붙은 이름이다. 일대를 지칭하는 북촌은 상층 양반 문화의 본산지라 할 수 있다. 중인들이 많던 서촌 일대와 분위기가 달랐다.
청와대 뒤 백악산 일대는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산에 오른 뒤 청와대를 돌아봐도 좋고, 청와대를 돌아보고 산에 가도 좋다. 등산로에 숨어 있는 얘깃거리 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백악산 능선이 손기정을 키웠다
먼저 마라톤 얘기다. 삼청동과 백악산은 한국 마라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여름올림픽이 열렸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이유로 참가를 꺼리던 프랑스, 영국 등의 유럽 국가들도 막판에 입장을 바꿨다. 세계 처음으로 TV 생방송을 실시한 대회는 화려했다. 히틀러는 대회를 통해 아리안족이 최고임을 자랑하고자 했다. 하지만 웬걸, 육상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선수 제시 오언스가 4관왕을 차지했다. 더구나 올림픽의 꽃 마라톤은 동양인 선수가 1위와 3위로 들어왔다. 손기정과 남승룡이다.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2 기록으로 사상 처음 2시간 30분 벽을 넘어섰다. 손기정을 키워낸 훈련장이 청와대 뒤 백악산 능선이다. 손기정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는 양정고보 시절 백악산 훈련 장면이 나온다.
“이른 아침 더운 김을 뿜어내며 가까운 삼청동 골짜기를 타고 북악 산정까지 뛰어올라 갔다. 그렇게 큰 산은 아니지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면 가슴으로 등으로 땀이 후줄근하게 흘러내리고 숨이 턱에 닿는 듯했다.… 산을 내려올 때 역시 좋은 훈련이 되었다. 나무가 줄지어 선 숲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일정한 리듬으로 피해 가며 달렸다. 마라톤은 음악처럼 리드미컬한 것이다….”
양천구 목동에 있는 양정고는 당시에는 서울역 뒤 만리동 산등성이에 있었다. 손기정은 학교에서 출발해 삼청동을 거쳐 백악산을 오르내리며 훈련했을 테다. 후배들도 이 길을 달렸다. 1947년 서윤복은 보스턴대회에서 우승했다. 1950년 보스턴대회에서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 2, 3위를 했다. 손기정 감독 아래서 훈련한 함기용은 백악산 훈련이 피오줌 나올 만큼 고통이었다고 회고한다. 백악산 능선을 ‘한국 마라톤 고향’ 또는 ‘한국 마라톤 성지’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1·21사태 소나무의 수난
두 번째는 소나무 얘기다. 손기정과 후배들이 숨차게 내달리던 백악산 성곽 능선에는 소나무가 많다. 그중 정상 아래에 있는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자칫하면 지나치기 쉽다. 나무 옆에 서 있는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센터(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그날의 긴박한 상황이 총탄 자국으로 남은 셈이다.
백악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 북촌이 가깝다. 북촌은 종로 윗동네 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말한다. 궁궐 사이에 있으니 조선시대에는 왕족과 사대부들의 근거지가 됐다. 세월이 흐르며 성북동·한남동·강남에 밀려 한풀 꺾였지만 지금도 곳곳에 대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화동에 있는 정독도서관은 본래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서재필, 을사오적의 하나인 박제순 집터였다. 이들이 망명한 뒤 몰수당한 집터에 이 땅의 첫 정규 중등교육기관인 한성중학교가 들어섰다. 학교는 몇 번 이름을 바꾸며 경기고등학교가 됐다. 1970년 이 학교 졸업생 10명 중 8명이 서울대에 들어갔으니 명문 중의 명문이다. 경기고가 1976년 강남으로 이사 간 뒤 도서관이 됐다.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은 종친부와 규장각, 서울의대 2병원, 육군병원, 보안사령부, 국군서울병원 등을 거쳤다. 대한항공이 서울시의 삼성동 땅과 맞바꾼 송현동 땅 일부에는 2027년 이건희미술관이 들어선다. 이래저래 사연 많은 청와대 주변이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처음 만나는 청와대> 저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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