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무게는 사랑의 무게?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본문
몹시 더웠던 어느 날,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가 탐스러운 수박 한 덩이에 나는 그만 홀리고 말았다. 진초록 바탕에 검은 줄이 세로로 그어져 있는 수박을 보고 있자니 이 크고 단단하고 둥근 과일을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의 반응이 문득 궁금해졌다. ‘쩍’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지는 수박, 그리고 드러나는 뜻밖의 붉은 과육.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은 놀랐을까 웃었을까? 신이 수박을 빚었다면 필연 무해한 장난기를 품고 있었으리라.
하여튼 나는 날이 몹시 덥다는 단 하나의 충만한 이유로 흔쾌히 수박을 샀다. 얇은 노끈에 감긴 수박을 한 손에 들고 가게 밖을 나오자마자 두터운 더위가 담요처럼 나를 덮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 수박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를 기다리느니 그냥 집으로 걸어가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수박의 무게는 상당했기에 수박을 든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고 걷느라 내가 봐도 내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그렇게 뒤뚱거리며 몇 분이나 걸었을까? 노끈을 쥔 손바닥이 금방이라도 두 쪽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곧 불길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툭’, 안 그래도 수박에 비해 지나치게 얇다 싶었던 노끈이 끊어진 것이다. 바닥에 추락한 뒤 데굴데굴 굴러간 수박은 어찌나 단단한지 흠집 하나 없었다. 내게서 달아나는 수박을 쫓으며 어쩌려고 이 더운 날 몸집만한 수박을 사서 걸어갈 생각을 했나 스스로를 원망했다.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끊어진 노끈을 어떻게든 수박에 씌워보려고 끙끙대다 결국 포기하고 품에 안았다. 따끈하고 무거운 수박은 땀에 절은 품 안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자세를 바꿔가며 수박을 안아봤지만 무엇 하나 편한 자세가 없었다. 마치 내려달라고 뻗대며 떼쓰는 어린아이를 힘으로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왠지 평소보다 멀어진 것 같은 집으로 향하면서 엄마 생각을 했다. 나보다 몸이 훨씬 작은 우리 엄마는 어떻게 여름마다 냉장고에 수박을 채워놓았을까? 네모반듯하게 잘려 반찬통에 차곡차곡 채워진 수박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달콤함에 가려진 엄마의 전쟁은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내게 수박이란 그저 여름별미일 뿐이었는데 이제보니 수박은 사랑이 아닌가. 수박의 무게, 그것을 손질할 때 생기는 잡스러운 집안일, 만만찮은 쓰레기. 그런 것들을 기꺼이 감수하려면 다름 아닌 사랑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수박은 안 먹어도 안 죽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굳이 그 모든 귀찮음을 감수하고 수박을 사서 쪼개는 행위에는 분명 사랑이 있다. 나는 힘겹게 들고 온 수박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따가 퇴근하고 돌아온 룸메이트에게 후식으로 내어줘야지. 내 사랑을 생색내야지 생각하며.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어찌나 달고 싱싱한지 단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정신없이 붉은 속살을 깨물었다. 내 사랑에 앞섶을 흠뻑 적시며 나중에 룸메이트가 떠난 뒤 혼자 살게 되더라도 여름이면 꼭 수박을 잘라 내게 먹이겠노라고 다짐했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www.korea.kr)]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