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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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는 타인처럼
흩어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대 향한 그리움(독백)
그대의 그림자에 싸여
이 한 세월 그대와 함께 하나니
그대의 가슴에 나는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가 되리라
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작사 배경모, 작곡 최종혁, 1979년 윤시내 1집)
가장 ‘윤시내스러운’ 곡, 그것은 ‘열애’다.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가장 처절한 노래. 윤시내에 의한, 윤시내를 위한, 윤시내만의 노래. 노래 좀 한다는 그 어떤 기성 가수가 불러도 그만큼 가슴을 후벼 파지는 못한다.
그는 한국 가요사의 ‘문제적 보컬리스트’다. ‘카리스마’, ‘아방가르드’, ‘아우라’, ‘도발적’ 정도의 단어가 그를 수식할 수 있을까.
키 160에 40킬로 남짓 나가는 마른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이른바 허스키한 ‘불꽃 창법’과 독보적 무대 매너, 독창적 무대 의상은 대중음악 그 어떤 장르에도 걸리지 않는 그만의 것이다. ‘윤시내류’라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누구는 “마돈나, 레이디 가가 이전에 윤시내가 있었다”고 했다.
역작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에서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은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 도무지 웃음이라곤 지을 것 같지 않은 표정, 그리고 양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감쌌다가 내리는 독특한 퍼포먼스는 거대한 의문부호를 그리는 것 같았고, ‘나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열애’의 노랫말은 여자의 것이 아니다. 세상과의 하직을 눈앞에 둔 남편이 아내에게 남긴 시다. 35세 남자의 유서가 불멸의 사랑 노래가 되었다.
그 남자는 부산MBC의 유명한 음악 피디였던 배경모(1943~1978)다. 직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그는 아내 김지현에게 절절한 편지시를 써주었다. 그의 사망 후 아내는 유명 작곡가 최종혁에게 멜로디를 입혀달라고 건네주었다.
최종혁은 애초 부산 출신의 최백호에게 이 노래를 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의 운명은 1978년 데뷔앨범 ‘공연히’로 가요계를 깜짝 놀라게 한 신인가수 윤시내에게 돌아갔다. 윤시내는 1979년 이 노래로 TBC 주최 세계가요제에서 은상을 받는다. 이어 1982년 ‘DJ에게’, 1983년 ‘공부합시다’, 1985년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를 자신의 시대로 만든다.
현악기의 비감한 전주에 이어 짧은 나레이션이 끝나면 노래는 베일을 벗는다. ‘그대의 그림자에 싸여…’ 이 한 구절이 모든 걸 말한다. 더 이상 무슨 사랑 고백이 필요하랴. 그대는 내 생애의 배경이었거늘. 그대와 함께 한 건 그냥 세월이 아니다. ‘이 한 세월’이다. 내가 살아 호흡한 모든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그대의 가슴에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로 남고 싶소. 이 사랑의 불꽃은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을 거요. 불꽃은 잦아들어 재를 남기지만, 내 사랑의 불꽃은 재를 허락하지 않을 거요. 영원히 타오를 거니까.”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사랑이다. 다 사랑한 건 없다. 사랑이 고통이라면 당신을 향한 사랑은 자발적 종신형이었다. 차라리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했던 시인처럼. 배경모는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랑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이도 이 노래로 그 사랑을 기억하니 둘은 이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랑의 끝에는 이별이 있다. 모든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삶처럼 모든 사랑도 애초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별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사랑도 마침표를 찍는 것일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다. 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그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진주다. 세월이 갈수록 더 단단하고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진주. 그는 아내의 가슴에 박힌 진주로 남길 바랬다.
사랑과 죽음을 노래한 대중가요는 많다. 거의 대부분 먼저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조성모의 ‘투 헤븐’은 하늘의 연인에게 안부를 묻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달라고 한다. 김정민의 ‘무한지애’는 당신이 부재한 이 어두운 세상을 떠나 당신 곁으로 가겠다는 노래다.
‘열애’를 들을 때나 부를 때, 눈물샘이 터지는 건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곧 하늘로 떠날 사람이 지상에 남아 있을 이에게 남겨준 노래다. 당신이 그리울 거라는 말은 없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내 사랑은 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 담담한 유언은 대중가요 노랫말의 통속성을 넘어선다.
‘열애’는 가사가 1절밖에 없다. 길지 않은 이 노래는 감정선을 따라가며 치닫는다. ‘그대의 그림자에 싸여…’ 차분한 독백으로 시작한 노래는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이루리라’부터 절정을 향해 가다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사랑을 피우리라’에서 드디어 폭발한다. 온 힘을 다해 마지막 꽃 한 송이를 피우고 소진해 쓰러지는 것 같다. 비틀고 쥐어짜던 윤시내의 몸은 비로소 그 비등점에서 조용해진다.
윤시내는 입술과 성대로 노래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노래를 토해내는 싱어다. 작은 체구에서 터져나오는 그 전류는 더 강렬하게 청중을 감전시킨다.
그는 2022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 음악의 롤모델인 미국 록 여가수 재니스 조플린의 영향을 받았다. 노래 부르면서 내 안의 감정을 응축시켰다 폭발시키는 창법이 편하다”고 말했다.
한국 대중가요에 윤시내의 ‘열애’만한 ‘열창’이 있을까.
윤시내(본명 윤성례)는 데뷔 전인 1974년 스물두 살 나이에 영화 ‘별들의 고향’에 수록된 ‘난 열아홉 살이에요’를 불렀다. 그 음색은 윤시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앳되고 여리다. 그는 이후 목소리를 갈고닦아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프로다. 독신에 혹독한 자기관리로 71세(그는 인터뷰에서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인 지금도 그 몸과 그 목소리 그대로 미사리에 있는 자신의 카페 ‘윤시내 열애’에서 열창한다. 어쩌다 방송에 나올 때는 사람들은 놀란다. 노래 부를 때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수줍어하고 조곤조곤 말한다. 2022년에 개봉한 영화 ‘윤시내가 사라졌다’에서 모창가수 연시내가 찾아나서는 진짜 가수 윤시내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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