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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등장해 전 세계를 사로잡은 보사 노바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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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보사 노바 보컬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스트럿 질베르토(Astrud Gilberto)일 것이다.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로맨틱한 멜로디들을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큰 기교 없이 노래했다. 비브라토가 전혀 없는 솔직한 가창에는 천진난만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이런 보컬 스타일은 어색함과 불안정함을 하나의 매력으로 전환시켜냈고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반주에 목소리가 매몰되는 일 또한 없었다. 

세간에는 보사 노바의 창시자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을, 보사노바 기타와 리듬을 확립한 이를 주앙 질베르토라 치켜 세우곤 했다. 

보사 노바 자체는 아스트럿 질베르토가 없었다 하더라도 성립했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보사 노바가 이처럼 메이저 장르로 전세계에 퍼져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여름에 부는 따스한 바람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그녀의 포르투갈어 가사는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81년 8월 20일 뉴욕에서 아스트럿 질베르토가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AP/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940년 브라질 살바도르에서 태어난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독일인 언어학자인 아버지와 브라질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고 가족들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했던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십대 시절 내내 음악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그 음악가 친구들 중에는 주앙 질베르토도 있었다. 1959년 19세의 나이에 주앙 질베르토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성을 ‘질베르토’로 바꿨다. 결혼 생활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질베르토’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1963년 뉴욕 맨하튼에서 남편인 주앙 질베르토와 색소폰 연주자 스탠 겟츠의 합작 를 녹음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는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96주 동안 머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앨범 중 하나가 됐으며, ‘The Girl From Ipanema’는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수상했고 비틀즈의 ‘Yesterday’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녹음된 곡으로 기록됐다. 

놀랍게도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보사 노바 스타일을 정의 내린 곡 ‘The Girl From Ipanema’를 노래하기 이전까지 녹음 경험이 전무했다.

‘The Girl From Ipanema’는 처음 주앙 질베르토의 포르투갈어 가사로 녹음됐다. 이후 스튜디오에 있는 브라질 사람 중 유일하게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아스트럿 질베르토였기 때문에 예정에 없었음에도 영어가사를 녹음해보기로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녹음 부스에 들어갔던 그녀는 영어 가사를 마치 꿈을 꾸는듯 캐주얼하게 노래했다. 

5분짜리 오리지널 버전에는 주앙 질베르토와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포르투갈어와 영어 가사가 차례로 진행되지만 이후에는 아예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영어 가사만 있는 2분짜리 버전으로 따로 싱글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는 녹음실에 있던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가 그녀의 미국 내 히트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예상을 넘어 국제적인 히트로 이어졌다. 

곡은 다양한 이들에게 영감을 줬고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라는 제목의 단편을 쓰기도 했다. 

, 그리고 ‘The Girl From Ipanema’는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장을 팔았지만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녹음에 대한 아무런 금전적 대가를 받지 못했다. 대신 TV 쇼나 돈 시겔의 <행드 맨> 같은 영화에 출연했고 공연을 이어 나갔다. 

앨범이 발매되고 얼마 후에는 결국 주앙 질베르토와 이혼하게 되고 아스트럿은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다.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한동안 스탠 겟츠와 투어를 다니며 공연했고 1965년에는 솔로 데뷔작 을 내놓는다. 

그렇게 키운 아들 마르셀로 질베르토는 후에 그녀의 베이스 연주자로서 그룹에 합류했고 시간이 더 흘러서는 엄마의 매니저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브라질 보사 노바를 전세계에 알렸지만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명성은 고국인 브라질 언론에서는 무시됐다. 

너무 빠른 속도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고 더구나 영어 가사를 섞어 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브라질의 기성 음악가들은 그녀의 성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아스트럿 질베르토를 그저 운이 좋았던 사람으로 여겼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녀는 고국의 기자들로부터 받은 가혹한 비판과 빈정거림에 매우 상처받았다 고백하기도 했다. 

결국 다시는 브라질에서 노래하지 않았으며 2016년 리우 올림픽 개막식에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아들 다니엘 조빔이 ‘The Girl From Ipanema’를 불렀을 때도 현장에 없었다. 브라질에 갈 때 그녀는 가수가 아닌 익명의 방문객 신분이었다. 

브라질발 삼바에 미국 재즈라는 향신료를 뿌리면서 보사 노바의 기적이 일어났고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자신만의 기적을 이어 나갔다. 

쳇 베이커와는 공연을 비롯 ‘Far Away’ 같은 곡을 함께 녹음하기도 했고, 색소폰 연주자 스탠리 투렌틴, 작곡가 제임스 라스트 등과의 합작 앨범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사 노바 클래식들은 물론 ‘Fly Me to the Moon’, ‘The Shadow of Your Smile’을 비롯한 미국 재즈 스탠다드들 또한 마치 보사 노바처럼 녹음했다. 

앨범이 거듭될 수록 보사 노바의 색은 줄었고 사람들은 모던 재즈로 그녀를 분류하기도 했지만 즉흥 창법이나 복잡한 것을 선호하지 않던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재즈 가수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제각각 보사 노바 붐이 불었다. 80년대에는 에브리씽 벗 더 걸 같은 이들이 보사 노바의 영향을 언급했고, 샤데이와 수잔 베가 또한 아스트럿 질베르토를 추앙했다. 

바시아는 아예 ‘Astrud’이라는 제목의 헌정 곡을 발표했다. 90년대 중반 조지 마이클은 에이즈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한 앨범 시리즈 에서 아스트럿 질베르토를 직접 찾아가 함께 ‘Desafinado’를 듀엣으로 녹음하기도 한다. 

2000년대 일본과 유럽, 그리고 한국에서 발매된 보사 노바 / 라운지 앨범들의 여성 보컬들 대다수는 아스트럿 질베르토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리사 오노 같은 뮤지션을 언급할 때 아스트럿 질베르토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0세기가 끝나면서 아스트럿 질베르토는 공연을 줄였고 대중과 가까워지는 것이 두렵다면서 외부 노출 또한 꺼렸다. 

철학과 동물 보호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녀는 2002년도 앨범 [Jungle] 발표 후 ‘무기한 휴가’를 갖는다.

사실상 은퇴했음에도 그녀의 노래는 꾸준히 TV CM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사용되었으며, 힙합 / 라운지 트랙들에 다수 샘플링됐다. 

2008년도 라틴 그래미에서는 평생 공로상을 받았고, 거의 소식이 없다가 몇일 전인 2023년 6월 5일에 가족을 통해 그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2008년 7월 브라질에서 열린 보사노바 반세기 기념 전시회 행사. (사진=저작권자(c) EPA/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무심한듯 세련된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창법은 독보적이었고 때문에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녀가 불렀던 노래들은 그런 가창법이었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악기 같았다. 미국 쪽에서는 이국적이라며 동경하는 한편, 브라질에서는 너무 미국적인 모양새였다며 거리를 뒀다. 

당시 그 어떤 브라질 출신 가수들 과도 달랐고 이는 미국과 브라질 양쪽 모두에서 혁신적인 전환-혹은 이단-이라 할 수 있었다.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시원하고 달콤한 가성은 각박한 도시인들에게 있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랑의 감정, 이별의 외로움 등 단순히 말로 하면 진부해져 버리는 것들에 그녀의 특별한 목소리가 입혀지는 순간 영원히 마음 속에 남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특히 여름에 들으면 고습도의 피로감을 단번에 30% 정도는 낮춰준다.

매년 여름마다 행복해지기 위해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레코드를 모조리 장에서 꺼내 한 번씩 돌려 들었다. 

보사 노바란 나른한 행복감과 슬픔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음악이었는데, 그녀의 부고 이후 당분간 이 노래들은 슬픔의 감정 쪽에 더 가깝게 감지되지 않을까 싶다.

☞ 추천 음반

◆ A Certain Smile, a Certain Sadness (1966 / Verve)

아스트럿 질베르토의 모든 앨범들이 그 위대함과는 별개로 균일하게 좋기 때문에 사실 특정 앨범을 꼽는 행위가 무의미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브라질 출신 오르간 연주자 월터 원덜리와의 합작인 본 앨범은 보사노바/라틴 명곡들을 오르간 연주 중심으로 구성해냈다. 월터 원덜리 트리오의 백업 경우 습한 오르간, 그리고 피아노의 반반 구성으로 배치해 놓았다.

◆ I Haven't Got Anything Better to Do (1969 / Verve)

후기 버브 발매 작으로 보사 노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보인다. 전반적으로 쓸쓸한 노래들, 더 이상 뭘 더 해볼 것이 없다는 앨범 제목, 무엇보다 앨범 커버 사진으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는 ‘눈물 앨범’이라 불리곤 했다.


한상철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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