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이 詩가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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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 작게 마련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한 어르신이 말을 건넸다.
“처음 뵙는 얼굴이네요. 사무실이 이 건물에 있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놀랐다. 담배를 피우면서 낯선 사람과 할 말이라곤 “혹시 불 있으세요?” 외에는 없지 않은가. 조금 경계하며 오늘 이 건물에서 회의를 한다고, 자주 오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여기는 제 비밀공간이거든요. 오는 사람이라곤 저뿐인데 반가워서 말을 걸었어요.”
그가 서글서글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기에 방송작가라고 했더니 몹시 반가워하며 자신도 시집을 한 권 낸 작가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너무 낭만적이라고, 시인보다 더 멋진 말로 감탄할 자신이 없어서 박수를 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 그런 시 말고요. 저는 어렵게 쓰질 못했어요. 비틀기는 아프니까요. 비틀린 몸, 비틀린 마음이 아프듯 글도 비틀면 저는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비유랑 은유가 거의 없는 단순한 시를 썼어요.”
그의 팔랑거리는 손짓을 타고 낭만이 떠밀려 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박수를 치며 말했다. “캬, 방금도 엄청 시 같았어요.”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물었다. “몇 학년이세요? 2학년?” “네? 저요? 아 저는 학생이 아니라….”
“허허, 그게 아니고 우리 세대 식 나이 표현인데, 저는 5학년 8반이에요.”
아무래도 그는 비유법의 귀재인 것 같았다. “저는 3학년 3반이에요!”라고 했더니 그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2학년 아니에요? 완전 사기다 사기!”라고 해서 나도 ‘사돈 남 말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어르신이야말로 4학년 1반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왠지 즐거운 대화가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두 번째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근래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을 말했는데 꼭 사서 보겠다는 내 말에 그는 흔쾌히 자신의 책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비정기적으로 회의하는 나로서는 살짝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다. 혹시 시간이 엇갈릴지도 모르니 호의만 받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그게 무슨 걱정거리라도 되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우리에겐 휴대폰이 있잖아요.”
아, 그렇지 참. 나는 만난 지 5분 된 5학년 8반 아저씨와 번호를 교환했고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 책도 빌리고 그가 쓴 시집도 선물받았다.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회의 시간이 다 돼 일어나야만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꼭 만나자고,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거듭하고 사무실을 나오는 내 손엔 책 세 권이 들려 있었다.
그가 빌려준 책 중 한 권을 무작위로 펼쳐봤다. 연필로 그은 밑줄과 그가 읽으면서 느낀 소감들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그걸 읽으면서 오늘 나눈 스몰토크(Small Talk)가 커다란 인연으로 번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휴대폰 메모장에 그와 나눈 대화를 적었다. 언젠간 이 일을 글로 적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에게도 이 짧은 시간이 시가 되길 바랐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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