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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미남불이 청와대에 앉아 있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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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안에 있는 문화유산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알고 있어도 알릴 수 없었다. 특수 공간이라는 이유로 연구자들도 접근할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던 2007년, 뜻밖의 사람들이 이를 정리했다. 경호실 직원 몇몇이 만든 역사문화유산 연구 동아리 회원들이었다. 이들이 갖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확인한 내용을 정리해 낸 책이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다. 내용이 방대하고 충실하다. 덕분에 문화유산은 베일을 벗었지만 일반인은 여전히 접근할 수 없었다. 2022년 청와대를 개방하며 비로소 누구나 볼 수 있게 됐다.
경내에는 의외로 한옥이 적다. 경복궁 후원 시절 즐비하던 한옥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졌다. 녹지원 일대에는 제법 큰 한옥 채인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었다. 이 둘은 1928년에 헐려 용산에 있던 일본 사찰 용광사로 갔다. 용광사는 대륙 침략 전쟁 중에 죽은 일본군 납골당 중의 하나였다. 광복 뒤 1946년 원불교가 이를 인수해 서울교당으로 만들었다. 그 뒤 일대를 개발하며 두 건물은 다시 해체해 전남 영광에 있는 원불교 영산성지로 갔다. 격변의 세기가 두 건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관저는 1990년에, 본관은 1991년에 지었으니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다가 본관은 콘크리트 골격에 청기와를 얹었을 뿐이니 형태만 한옥이다. 보다 오래된 한옥은 세 채다. 녹지원에 있는 상춘재가 가장 크다. 외부 귀빈을 맞아 환담하는 장소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3년 준공했다. 200년 넘은 소나무로 제대로 지었다. 2022년 3월 28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이 만찬 회동을 가졌던 장소다.
지금의 관저 일대에는 본래 오운각과 침류각이 있었다. 오운각은 임금이 후원을 나들이할 때 머무는 쉼터였다. 오운(五雲)은 ‘오색구름이 펼쳐진 신선 세계’라는 의미다. 풍광이 빼어난 자리지만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을미사변 때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녹산에서 불태우고 오운각 서쪽 봉우리 아래에 묻었다. 관저 뒤에 있는 오운정은 경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다. 초서 흘림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오운각과는 다른 별개 건물이다.
관저를 지으며 침류각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침류(枕流)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이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는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들렸을 텐데 이사를 하며 풍취를 잃었다. 현판이 없고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다. 건립 시기도 분명치 않다.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이승만정부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기록이 없다.







녹지원 천록은 어디서 왔을까
관저 뒤에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라고 새겨진 큼지막한 바위가 있다. 금석학자 임창순은 글자를 새긴 시기를 빨라야 1850년 전후로 본다. 화강암은 비바람에 약한데 음각으로 새긴 글자들의 풍화가 크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1865년에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으니 이를 위한 명분 쌓기나, 대역사의 성공 기원용으로 새기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를 가지고 청와대가 예부터 명당이라고 하는 주장은 군색하다. 이 바위 아래에 천하제일복지천이라는 샘이 있었다. 왕에게 올렸다니 족보가 있는 샘이었다. 관저 뒤란에 이를 본뜬 샘을 만들어놓았다. 식수로 쓰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천하제일복지 바위 위쪽에 불상 하나가 앉아 있다. ‘미남불’로 알려져 있는데 정식 이름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제작연대를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으로 추정하는데 팔자가 기구하다. 본래 고향은 경주 남산 계곡에 있는 절인 ‘이거사’다. 이를 1912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서울 남산에 있던 총독 관저인 왜성대로 옮겼다. 남산에서 남산으로 거처를 옮긴 셈이다. 그 뒤 1939년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며 불상도 함께 옮겼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 관저를 신축하며 불상은 다시 100m 정도 위인 현재 자리로 이사했다. 짐을 세 번 쌌는데도 훼손 없이 온전한 모양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본래 있던 경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니 불상의 운명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녹지원에서 상춘재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에는 돌을 깎아 만든 천록(天鹿)이 있다. 하늘에 사는 사슴으로 임금이 선정을 펼치면 나타난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본래 관저 자리에 있던 침류각 앞에 놓여 있었다. 관저를 지으며 함께 가지 않고 상춘재 앞으로 옮겼다.



흥미로운 일이 있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조사해보니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인 천록과 상춘재 천록의 석질이 흡사했다. 같은 돌로 깎아 만든 쌍둥이일 수 있다는 얘기다. 창경궁 옥천교 아래는 석물이 있을 법한 자리가 비어 있다.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쌍둥이 천록을 만들어 하나는 옥천교 아래에 놓고, 다른 하나는 경복궁을 중건한 뒤 후원인 청와대 자리에 갖다놓지 않았을까? 그 뒤 어떤 경로를 거쳐 옥천교 천록은 고궁박물관으로 가고, 후원의 천록은 상춘재 앞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창경궁은 15세기에, 경복궁 후원은 19세기에 지었으니 시대가 다르다. 옥천교 빈자리에는 다른 석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 천록도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천록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미스터리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처음 만나는 청와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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