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나무 5만 5000여 그루 천연기념물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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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축구장 35개 크기의 초대형 정원이다. 창덕궁 후원 못잖은 풍경을 자랑한다. 최고 권력의 공간이었던 만큼 나무와 풀들도 대통령급 관리를 받아왔다. 청와대 일대가 훼손 없이 식생을 유지해온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 124군부대 소속으로 전원 장교로 구성된 인간 병기들이었다. 목표물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국군으로 위장하고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험준한 산길을 내달려 40여 시간 만에 북한산 비봉에 도착했다. 경악할 속도였다. 결행 직전 자하문에서 검문에 걸린 이들은 청운동 일대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북악산과 인왕산 쪽으로 도주했다. 그 뒤 14일 동안 침투 병력 중 28명이 죽고 2명은 도주했다. 생포된 1명이 김신조다. 백악산 능선에는 당시 교전 중 총탄을 맞은 소나무가 서 있다.
1·21사태 뒤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는 절대 보안공간이 됐다. 청와대 주변에는 경계시설이 이중삼중으로 들어섰다. 등산로를 폐쇄하고 출입을 허용한 길이라도 드나드는 시간을 정해 관리했다. 서울 한복판의 비무장지대와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일대 자연이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보존됐으니 역사의 역설이다.
청와대에 가서 건물들만 휙 돌아보고 나오면 50점짜리 관람이다. “와 넓다 넓어!” “오 웅장하군!” “어 좋은데!” 정도의 감탄사 외엔 별 감흥이 없다. 좀 더 공부해서 경내의 식생까지 살펴본다면 100점짜리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경내에는 208종 5만 5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덩치 크고 나이 많은 나무들은 녹지원 개울 주변에 모여 있다.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일대 숲은 300년 넘게 울창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2022년 10월 문화재청은 경내 나무 6그루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5그루가 녹지원 일대에 있다. 회화나무가 3그루고 말채나무와 반송이 1그루씩이다. 나머지 하나인 용버들은 연풍문 옆에 있다. 말채나무와 용버들은 처음으로 천연기념물 목록에 올랐다. 키 22m가 넘는 용버들은 이 땅에서 가장 장대한 버들이다. 여느 버들 종류처럼 물을 좋아해 녹지원에 흘러나온 개울이 경복궁으로 흘러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다. 어느 날 옆을 지나가던 이명박 대통령이 용버들을 보고 말했다. “여기 공원 만들면 좋겠네.” 건설업계 출신의 감각으로 땅의 내력을 알아본 셈이다. 여기에 버들마당이 생긴 연유다.
청와대 경내는 천연기념물급 나무들이 꽤 있다. 하지만 보안지역이라 조사가 쉽지 않으니 기념물로 지정하고 싶어도 지정할 수 없었다. 어디보다 안전한 지역이고 정원사들이 극진하게 돌보고 있으니 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경내 최고 어른은 수궁터(옛 본관)에 있는 주목이다. 2023년 기준 745세로 고려 충렬왕 시절에 태어났다.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목록에서 빠져 의아한데 이유가 있다.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3년 옛 본관을 역사바로세우기 명분으로 철거했다. 건물이 있던 자리는 동대문역사를 공사할 때 나온 흙을 가져다 터를 높이고 정원을 만들었다. 나무는 허리까지 흙을 덮으면 죽는다. 현장에 있던 주목을 살리기 위해 뿌리를 자르고 들어 올려 다시 심었다. 그런데 기록이 부실해 주목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위치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천연기념물이 되고도 남는 나무지만 이 때문에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가다 보면 대정원 좌우에 늘씬한 금강송이 5그루씩 서 있다. 영동고속도로 원주~강릉 구간을 공사할 때 현장에 있던 나무를 옮겨 심었다.
대통령들이 심은 나무를 찾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영빈관 뜰 앞에 있는 무궁화는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김대중 대통령이 심었다. 영빈관 동쪽 담장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가이즈카향나무가 있다. 1978년 12월 23일에 심었다. 영빈관을 준공한 기쁨에 한겨울에 심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본관 동쪽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구상나무가 있다. 한라산, 태백산과 같은 고산지대에서도 사라져가는 나무인데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산바람 통로라 한여름에도 시원한 자리여서 그럴까. 대통령 나무는 녹지원과 상춘재 일대에 많다. 막내는 2022년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전에 심은 모감주나무다. 전두환 대통령은 상춘재 앞에 백송을 심었다. 재임기간이 짧았던 최규하 대통령도 헬기장 옆에 독일가문비나무를 심었다. 수궁터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심은 복자기가 있고 소정원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심은 이팝나무가 있다. 이팝나무는 박 대통령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좋아한 나무다. 성곽로 꼭대기에 있는 백악정 옆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느티나무와 노무현 대통령의 서어나무가 있다. 노 대통령도 느티나무를 좋아했지만 김 대통령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의미로 보다 세력이 작고 서로 어울리는 나무를 심었단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11그루씩 서 있는 반송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심었다. 경내에 12명의 대통령 중 11명이 심은 20종 33그루의 나무가 있다. 윤보선 대통령도 나무를 심었을 텐데 표지석이 없어 알 수 없다. 대통령 나무는 이보다 많을 텐데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아쉽다.
나무는 너른 품으로 새를 부르고 그늘 아래로 사람을 부른다. 청와대에 가거든 고개 들어 볼 일이다. 사연 많은 나무들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걸어올 테니.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처음 만나는 청와대> 저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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