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로 이어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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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내가 초조하고 다급하게 묻는다.
“아니 없어! 얼마나 남았어?”
룸메이트 박이 창밖의 동태를 살피며 나를 채근한다.
“13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그때까지 안전할까?”
“그러길 바라야지.”
볕 좋은 어느 주말 아침, 나와 룸메이트 박이 나눈 대화다. 우리의 목적은 마당에 있는 빨랫줄을 옆집 할머니보다 먼저 사수하는 것이다. 남은 세탁 시간은 5분, 4분, 3분. 조금만 더. 이윽고 빨래 종료를 알리는 경쾌한 기계음이 들린다. 승리를 확신하며 바삐 빨래를 꺼내는데 우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비유적 표현으로서 그림자 말고 진짜 그림자. 우리 집 창문 앞 빨랫줄에 빨래가 널렸다는 뜻이다. 김이 팍 빠진다. 아, 또 졌다. 축축한 내 이불이 거실 빨래걸이에 우울한 모양새로 엉거주춤 걸쳐진다. 창문으로 들어왔어야 할 햇빛을 온몸으로 차단한 채 위풍당당하게 펄럭이는 옆집 할머니의 이불에 눈을 흘긴다. 네가 쬐는 그 빛, 그 빛이 내 빛이었어야 해.
우리는 2층짜리 주택의 1층에 살고 있다. 작년까지는 우리가 이 집의 유일한 세입자였는데 얼마 전 공실에 할머니가 이사 오시면서 맘 편히 썼던 빨랫줄에 경쟁이 붙었다. 사실 말이 경쟁이지 우리는 거의 항상 패배자다. 아침 7시에 빨래를 너는 할머니의 부지런함은 정말이지 경이로울 정도. 그녀를 이길 재간이 없어서 별수 없이 실내에 빨래를 너는 날이 많아졌는데, 아무래도 햇볕에 말리는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햇볕에 넌 빨래는 울샴푸(중성세제)를 아무리 많이 풀어도 감자칩처럼 바삭하게 마르기 때문에 빨래를 접을 때면 색종이 접기를 하는 것 같은 반듯한 기분이 든다. 다 갠 빨래를 툭툭 두드리면 뭉클뭉클 삐져나오는 따뜻한 햇볕 냄새도 좋다.
반면에 집 안에 넌 빨래는 고양이가 한 번 입었다 벗어놓기라도 한 듯 고양이털이 잔뜩 묻어 있어서 개기 전 돌돌이(먼지 제거기) 하는 데만 한나절이 걸린다. 그리고 분명 다 말랐음에도 습한 기운이 남아 있어 몹시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한 이유들로 바깥에 할머니의 빨래가 걸려 있으면 옅은 패배감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오늘 걸린 할머니 빨래는 좀 다르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내 상실감과 패배감을 눈치채신 것 같다.
저 빨래는 날 달래려고 작정하고 널어놓으신 게 분명하다. 아주 촌스러운, 그래서 엄청 귀여운 곰인형이 창문 앞에 걸려 있다. 곰돌이 목에는 할머니의 스카프가 감겨 있는데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되셨던 걸까? 할머니와 곰돌이의 귀여운 스토리를 마음대로 상상하며 집으로 들어왔는데 거실 한 가운데에 곰돌이가 앉아 있다. 아니, 그러니까 곰돌이 그림자가 앉아 있다. 바람이 불면 목에 감긴 스카프가 살랑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또렷한 그림자다. 아, 마음이 녹는다. 한여름날 실수로 떨어뜨린 흰 아이스크림콘처럼 무참하게 녹아버린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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