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보존은 나의 뿌리를 알고 고향을 찾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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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여의도(汝矣島)의 뜻을 한자대로 풀어보면 ‘너의 섬’ 또는 ‘너나 가질 섬’이란 뜻이 된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된 이곳을 너나 가지라니? 땅이름의 유래를 거슬러 옛 문헌 등을 살펴보면 여의도는 너른 벌의 섬이란 뜻의 ‘너벌섬’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즉 ‘여’는 ‘너’란 뜻의 한자를 취한 것이고 ‘의’는 옷의 옛말인 ‘벌’을 취한 후 같은 발음인 어조사 ‘의’로 한 번 더 변형된 것이다. 그래서 여의도가 너나 가질 섬이란 뜻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한낱 근거가 없는 소리다.
비슷하게 독도(獨島) 역시 홀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섬이란 의미가 아니라 바위섬이란 뜻의 ‘독섬’이 한자로 변형되면서 생긴 오해다. 옛말 중 돌이란 뜻을 지닌 ‘?’의 전음이 ‘독’이기 때문이다. 임진강의 한 대지류인 한탄강(漢灘江)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한탄해 이 같은 이름이 붙었을까 싶지만 큰 여울이란 뜻의 ‘한여울’에 ‘여울 탄(灘)’자를 써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게 됐다. 주변 하천에 널빤지로 다리를 놓고 다니던 풍습이 있던 판교는 ‘넓은 다리’라는 이름 뜻처럼 사람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플랫폼 기업들의 무대가 됐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은 지난 2월 펴낸 <또 하나의 생활문화 지도, 땅이름>(마리북스)를 통해 이같이 다양한 지명의 어원을 풀어냈다. 청계천, 용산 등 서울 중심지 땅이름부터 가재울이나 노루목, 곰달내와 같이 이제는 생소해진 토박이 지명의 생성과 변천 과정을 두루 담았다. 그는 “공룡이 살던 시대를 알기 위해 화석을 연구하듯 우리말과 옛 사람들의 생활모습, 조상들의 생각을 알려면 옛 땅이름을 살펴보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땅이름은 우리말의 화석”이라고 강조했다.
60년간 전국 찾아다니며 땅이름 연구, ‘간첩’ 오해도
1938년생인 배 회장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우리말과 땅이름을 연구해온 토박이 땅이름 전문가다. 땅이름의 유래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발로 뛰며 답사를 다녔다. 그 과정에서 ‘간첩’으로 오해받는 등 에피소드도 넘친다. “이 산 이름은 뭡니까. 그럼 저 산 이름은요?” 하며 묻고 다니는 흙투성이 낯선 젊은이가 사람들 눈에 이상한 것은 당연했다. 이후 보다 연구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교수, 교사, 지리·언어·풍수학자 등과 손잡고 1984년 한글땅이름학회를 발족했다. 옛 우리 땅이름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한 학계의 구심체다. 지금도 1년에 네 번 학술발표회를 열고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
배 회장은 신도시, 지하철역 등 우리 땅이름을 제·개정하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서울시 교통연수원 교수와 국토지리정보원 중앙지명위원을 역임했고 2001년부터 18년간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서울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성남 지역 일부가 포함된 ‘위례신도시’, 광주광역시와 전남 나주시에 걸친 ‘빛가람혁신도시’가 그의 작품이다. ‘위례’는 순우리말로 우리(울애) 또는 담, 울타리를 뜻하고 ‘빛가람’은 광주(光州)의 ‘빛’과 나주 영산강의 ‘가람(강의 옛말)’을 합친 것이다. ‘청와대사랑채’도 배 회장이 직접 지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이름 은행인 ‘하나은행’과 ‘한솔제지’ 등 사명도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노학자는 “갈수록 우리 땅이름이 사라져간다”며 안타까워했다. 한자·영어 이름에 밀려 우리말 땅이름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건 물론 지역적 특색을 담아 만들어진 토박이 땅이름도 뜻이 왜곡되거나 전혀 다른 뜻을 지닌 이름으로 남아 불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토박이 땅이름이 사라지는 요인은 다양한데 배 회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한자로 변형’이라고 짚었다.
“곰나루의 ‘곰’은 크다는 뜻의 우리말 ‘검’에서 나온 건데 이걸 굳이 웅진(熊津)으로 표기해요. 그러니 사람들은 곰이 건너다닌 나루였다고 믿는 거죠. 신사동(新沙洞)의 옛말은 ‘모랫말(모래마을)’이에요. 신사동이 있는 한강변이 모래벌판이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한자로 바꿔버리니 이젠 누가 신사동에서 모래를 떠올릴 수 있겠어요. 신사숙녀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식민통치 시절 일본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원래 이름 뜻을 희석시키거나 여러 땅이름을 멋대로 합친 것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창지개명’이다. 배 회장은 “서울 시내 지명 가운데 50%는 일제 잔재”라고 꼬집는다. 일례로 서울 용산전자상가와 청파동을 잇는 욱천고가차도의 ‘욱천’이란 이름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승천기의 ‘욱(旭)’에서 유래했다. 서울시에서는 몇 해 전 이를 옛 지명인 ‘만초천(덩굴이 무성한 풀의 내)’으로 되돌렸지만 여전히 고가차도 초입엔 욱천고가차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원각사 절이 있어 ‘절골’이라 불리던 인사동은 종로구에 있던 관인방의 ‘인’, 대사동의 ‘사’를 합쳐 만든 이름으로 바뀌면서 본래 뜻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가장 많은 마을이 모여 있었고, 마을마다 각각 이름이 있던 서울 종로구는 관철동, 궁정동 등 동 이름 가운데 30% 이상이 일제 때 변형되거나 사라졌다”고 배 회장은 설명했다.
‘애오개역’ 등 옛 땅이름 시설물에 새겨 복원
배 회장은 서울시 요청으로 4년 전 ‘서울의 토박이 땅이름 지도’를 만들었다. 사라져가는 우리 땅이름을 기억하고 되찾기 위한 일환으로 서울 시내 법정동의 옛 땅이름과 그 뜻을 일일이 밝혀냈다. 그러나 지명을 모두 옛말, 우리말로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배 회장은 “지명을 바꿀 수 없다면 지하철역이나 공원, 고개, 다리 등 시설물 이름에 토박이말을 쓰자”고 제안한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이 좋은 사례다. 애오개는 ‘작은 고개’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아현’으로, 역이름을 제정할 당시 이미 아현역이 있었기 때문에 남아현역, 북아현역으로 할 수도 있었던 걸 국가지명위원이었던 배 회장이 지역 특성을 담은 토박이 지명으로 할 것을 주장해 애오개역이 됐다. 배 회장은 “토박이 땅이름을 역 이름에 새겨놓으니 사람들 입에 돌지 않나. 덕분에 사라질 뻔한 우리말이 살아났다”며 입술에 힘을 줬다.
이처럼 우리 땅이름은 지역 특성과 역사,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한다. 배 회장이 옛 땅이름을 ‘무형의 문화유산’이라고 일컫는 이유다. 그는 “우리 땅이름을 보존하는 건 결국 나의 뿌리, 고향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KBS <전국노래자랑> 한번 봐요. 출연자들 이름 밑에 주소가 뜨잖아요. 사는 곳이 그 사람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길에서 태어났죠. 지명은 나의 뿌리를 찾는 근거가 되기도 해요. 그래서 땅이름은 고향을 인식하는 데 중요합니다. ‘거북골’, ‘새텃말’, ‘말죽거리’와 같은 옛 땅이름은 단번에 어느 동네인지를 인식하기도 쉽고 고향의 따스한 정취가 어감에서도 살잖아요. 토박이 땅이름 자체가 고향을 계속 기억하게 하는 거죠.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땅이름을 버릴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겐 없어요. 그걸 보존하는 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조윤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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