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 정책소식 | 정보모아
 
정책소식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작성자 정보

  • 칼럼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btn_textview.gif

1.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2.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1967년, 작사 박현, 작곡 이봉조)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이미지. (네이버 영화)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이미지. (네이버 영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 아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흐르는 노래가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내 엉덩이를 자석처럼 붙잡아놓은 것이다.

“모든 것은 ‘안개’라는 노래에서 시작됐다.”
박찬욱 감독한테 이런 황송한 오마주를 받은 노래. 그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곡이 발표된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가요 중 하나가 ‘안개’입니다. 정훈희씨는 제일 좋아하는 여자 가수고요. 가사 중에서도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라는 가사가 특히 더 제 심금을 울렸죠. 안개가 뿌옇게 끼어서 시야가 흐릿할 때 눈을 똑바로 뜨고, 잘 보이지 않는 뭔가를 열심히 보겠다는 의지와 노력을 느꼈어요. 여러 가지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상태나 사물이나 관계, 감정 같은 게 다 이 노래에서 출발했다고 보면 됩니다.”

노래 ‘안개’는 단순히 영화의 OST가 아니다. ‘헤어질 결심’은 전적으로 노래 ‘안개’에 기댔다. 남녀 주인공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사이를 감싸고 있는 사랑의 감정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자욱한 안개다. 촉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관객은 답답하다. 바람이 안개를 걷어가 주길 바라지만, 영화는 끝끝내 ‘미완’이다. 감독은 사랑의 기승전결을 기대한 관객에게 거꾸로 “안개 속에 눈을 떠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남편을 추락사한 혐의를 받는 서래와 형사 해준 사이에 벌어진 ‘미제 사건’이다.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스스로 해준의 영원한 미제 사건이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햇볕이 안개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킨 것처럼.

안개가 걷히고 난 후 남는 건 무수한 질문이다. 영화는 미결(未決)을 통해 사랑을 완결(完決)한다. 베드신 한 컷 없는 이 미완의 사랑에 공소시효를 물을 수 없다. 박 감독은 “사랑 영화를 연출하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안 쓴 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감독은 그걸 ‘고전적이고 우아한 사랑이야기’라고 표현했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서래)
“나는 붕괴되었어요.”(해준)

영화의 뮤직비디오를 본다. 강렬하게 몽환적이다. 새벽안개가 내려앉은 듯 희미한 여명의 숲속, 하얀 옷을 입은 모니카의 유난히 긴 팔이 흐느적일 뿐이다. 앞으로 나갈 듯 멈출 듯 춤사위는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주저하는 서래와 해준의 마음이다. 그 사이로 감미롭고 애잔한 함춘호의 간결한 기타 반주에 송창식의 나지막한 저음과 정훈희의 처연한 고음이 밀당을 한다. 지독하게 아름답다. 

노래 ‘안개’를 탄생시킨 김수용 감독의 1967년 영화 ‘안개’. 김승옥 작가의 빼어난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로 만들었다. 신성일-윤정희가 주연을 맡았다.노래 ‘안개’를 탄생시킨 김수용 감독의 1967년 영화 ‘안개’. 김승옥 작가의 빼어난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로 만들었다. 신성일-윤정희가 주연을 맡았다.

‘안개’의 원조는 소설가 김승옥이다. 1964년 김승옥이 스물세 살 때 발표한 한국 현대문학 사상 가장 탁월한 단편 ‘무진기행’이 노래 ‘안개’를 탄생시켰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무기력한 서울 남자 윤희중이 고향 무진에 머무는 2박3일간 음악 교사 하인숙을 만나며 현실과 일탈 사이에서 번뇌하는 이야기다. 안개로 뒤덮인 무진은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이며 탈일상적인 공간이다. ‘헤어질 결심’의 배경인 가상의 안개도시 이포는 바로 무진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國語)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무진기행’에서)

사랑은 정녕 만져지지 않는 안개인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안개처럼 떠나므로 말해서는 안되는가. 소설 ‘무진기행’이 영화 ‘헤어질 결심’에 드리운 그림자는 짙다.

‘무진기행’은 세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1967년 처음으로 ‘안개’(신성일·윤정희 주연)라는 제목으로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한국 최초의 모더니즘 영화로 한국영화사에 걸작으로 평가된 작품이다. 김수용 감독은 영화 주제가를 당시 잘 나가던 작곡가 이봉조에게 맡겼다.

1967년 여름 어느 날. 부산에서 상경한 17세 소녀 정훈희는 남대문 인근 한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악단장이었던 작은아버지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 시간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이봉조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클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를 본 이봉조의 첫마디는 “얘는 누구야? 가시나 쪼깐한 게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였다고 한다. 이봉조는 색소폰 연주곡을 일단 만들어놓고 현미에게 부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렇게 이봉조-정훈희 두 사람의 긴 운명적 동반은 시작됐다.

1967년 ‘안개’가 실린 정훈희의 첫 번째 앨범.1967년 ‘안개’가 실린 정훈희의 첫 번째 앨범.

‘안개’는 정훈희의 인생을 바꿨다. 이봉조는 MBC 라디오 박진현 PD(가수 박일남의 부친)에게 가사를 부탁해 급히 데모 음반을 만들어 각 방송사에 보냈다(김승옥이 직접 작사했다는 설도 있다). 노래가 방송을 타자마자 신청이 쇄도했다.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고 음반도 40만 장 이상 판매되면서 “소설도 걸작, 영화도 걸작, 노래도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훈희는 이 노래를 들고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 참가해 38개국 44개 팀과 겨뤄 ‘월드 베스트10’에 들었다.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 수상이다. 1979년 제20회 칠레가요제에서 정훈희는 이봉조 작곡의 ‘꽃밭에서’를 불러 최우수 가수상을 받았다.

노래 ‘안개’는 55년 세월을 두고 두 영화의 주제곡이 된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송창식이 오래 전 안개를 리메이크한 음반을 듣고는 듀엣으로 이 노래를 녹음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사리 카페를 찾아가 송창식에게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한다.

박찬욱 영화의 특징은 기억에 잊힌 노래를 절묘한 장면에 삽입해 극적 효과를 높인다는 점이다. ‘빨간 구두 아가씨’(남일해, ‘친절한 금자씨’ 삽입), ‘님이 오는 소리’(뚜아에무아, ‘아가씨’ 삽입), ‘이등병의 편지’(김광석, ‘공동경비구역 JSA’ 삽입), ‘보고 싶은 얼굴’(민해경, ‘올드보이’ 삽입)이 그랬다. 노래는 영화에서 부활했다.

정훈희의 첫 번째 앨범에 실린 ‘안개’와 이번에 녹음한 ‘안개’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사랑의 감정을 몰랐을 열일곱 소녀의 안개와 사랑을 켜켜이 헤쳐온 71세 디바의 농밀한 안개가 어찌 같을 수 있으랴. 깊숙한 울림부터 다르다. ‘안개’를 리메이크한 가수는 많지만 정훈희만의 창법만이 농무(濃霧)다.

주인공이 바닷가를 미친듯 헤매는 장면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불쑥 기타 하나만의 선율을 타고 노래 ‘안개’가 흘러나온다. 지극히 애잔하고 몽환적이다. 마지막까지 힘겹게 붙들고 있던 이성은 마침내 붕괴된다.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노래 중간에 터져나오는 이 부분에서 감성은 함락된다.
 
노랫말 자체가 문학적으로 세례 받은 건 아니다. 안개 속을 거닐며 떠나간 정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대중가요 가사다. 다정했던 당신과의 추억을 생각한들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에 하염없이 안개 속을 걷는다. 당신은 불쑥불쑥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클리셰라도 좋다. 가사는 진실해서 심금을 울린다. 노랫말의 백미는 마지막 구절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다. 그래 이제 헤어지마. 아니 헤어져 주마. ‘헤어질 결심’이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 글이 없습니다.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