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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무료 심장 수술 노숙인 자활 돕기 “봉사가 우리를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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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기 국민추천포상 대통령표창 박국양·조태례 부부

‘심장이 뛴다’는 말은 곧 ‘살아있다’는 말이다. 멈출 위기에 있는 심장을 다시 힘차게 뛰게 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생사의 경계에서 촌각을 다투며 심장을 살리는 일은 그만큼 힘들고 긴장되는 일이다. 때문에 흉부외과는 의대 전공의들이 기피하는 대표적인 과다. 남들은 싫다는 일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40년 가까이 심장 수술을 해온 박국양(66) 가천대 길병원 흉부외과 교수다.
박 교수는 자신을 ‘심·수·가·행(심장을 수술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86년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그는 심장 수술의 권위자로 꼽힌다. 그의 이름 앞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어 있다. 국내 최초로 심장과 폐를 동시 이식하고 수혈 없이 환자의 심장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심부전증 환자에 대한 심근 성형술, 헬리콥터로 이송된 뇌사자의 심장을 적출해 이식하는 수술도 그가 처음 해냈다.
지금까지 한 심장 수술만 3000회가 넘는다. 그중 국내외 소외계층을 위해 진행한 무료 심장 수술만 430회에 달한다. 의대생 시절부터 무의촌(의사 및 의료 시설이 없는 곳)을 돌며 심장병 환자를 진료해온 그는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후 본격적으로 무료 심장 수술과 진료에 참여해왔다.
이외에도 박 교수는 아내 조태례(63) 가천대 특수치료대학원 겸임교수와 함께 다양한 봉사 활동을 통해 심장을 살리는 일뿐 아니라 삶을 살리는 일도 해왔다. 2014년부터 사재를 털어 노숙인과 출소자를 위한 자활공동체 ‘푸른들가족공동체’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탈북 의료인과 아프리카 유학생을 위한 지원사업도 하고 있다.
최근 부부는 값진 상을 받았다. 지난 2월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제12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대통령표창을 수상한 것이다. 국민추천포상은 우리 사회에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는 이웃을 국민이 추천하면, 정부가 포상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포상하는 제도다. ‘국민이 뽑는 유일한 포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박 교수는 “‘의사의 24시간은 환자용이다’가 저의 평생 모토다. 심장병 아이들에게 건강한 삶을 찾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보람이고 긍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상을 받아서 죄송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박수받아 마땅한 일에 그는 왜 죄송하다는 말을 꺼낸 것일까? 박국양·조태례 부부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상을 받고 한 말이 ‘감사하다’, ‘기쁘다’가 아니라 ‘죄송하다’였다.
국민이 추천하고 뽑는 상이라니 당연히 기뻤다. 대단한 분들과 함께 상을 받아 감사하기도 했고. 하지만 상을 받으려고 해온 일이 아니다 보니 상을 받는 게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동참하시거나 좋은 마음을 보내주는 분들과 함께 받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다.
40년 가까이 국내외 소외 계층을 위해 무료 심장 수술을 해왔다.
(박 교수) 1986년 부천세종병원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무료 심장 수술에 참여했다. 병원 차원에서 전국의 보건소를 찾아다니며 심장 수술이 필요한 취약계층을 찾아내 진료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1996년부터는 길병원에서 매년 실시하는 해외 심장병 환자 대상 무료 수술에 참여하고 있다. 베트남, 중국, 몽골, 캄보디아 등 우리보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나라의 환자들을 300명 가까이 치료했다.
심장 수술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 수술만 하면 크게 호전되는데 병원 문턱을 넘기가 어렵다. 입술이 파랗고 숨이 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이가 심장 수술 후 병원을 뛰어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사로서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장비와 의료진, 수술비까지 병원이 나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술 후원자를 찾아서 연결해주는 사회복지사의 역할도 크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협력해 다 같이 해온 일이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박 교수) 중국 옌볜에서 온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였는데 엄마는 한국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심장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한국에 데려왔는데 국내 대형병원 2곳에서 수술을 거부한 상태였다. 수술이 워낙 복잡해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나한테까지 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아이는 심장 이식 수술에 성공해 지금 건강하게 살고 있다. 매년 아이 엄마가 고맙게도 와이셔츠 선물을 하며 안부를 전해온다.
흉부외과 전문의는 ‘극한직업’으로 꼽힌다. 봉사까지 하다 보면 힘들 텐데 버티는 원동력은?
(박 교수) 흉부외과 수술은 생명과 직결되는 수술이다. 응급·중환자도 많다. 어렵고 힘드니까 점점 지원하는 의사가 줄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생명을 살린다는 보람을 느끼며 힘을 낸다.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긴 해도 여전히 눈도 잘 보이고 손도 안 떨린다.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고맙고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진료하고 수술하고 싶다.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탁구도 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며 기초 체력을 관리한다.



박 교수는 주말에도 쉴 틈이 없다. 병원 진료가 끝나면 충남 당진에 있는 푸른들가족공동체로 달려간다. 2014년 아내 조태례 교수와 함께 설립한 푸른들가족공동체는 노숙인과 출소자의 자활을 돕는 곳이다. 조 교수는 아예 이곳에서 노숙인과 출소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다시 사회로 나아가도록 돕고 있다. 조 교수는 사회복지와 노인복지를 전공한 박사이자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다. 이곳에서는 박 교수 역시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사회복지사다.

노숙인과 출소자에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조 교수) 결혼 전 나는 봉사라곤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다니는 의료 봉사를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레 봉사를 시작했다. 아이들도 아빠를 따라다니며 무의촌에서 방학을 보냈다. 우리 가족에겐 봉사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좀 더 전문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전공은 서양화였는데 사회복지과로 편입해 사회복지와 노인복지를 공부하고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서 정신보건에도 관심을 갖고 미술 치료를 시작했다. 조금만 도와주고 관심을 가지면 달라질 수 있는 사람들인데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그들과 생활하며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남편에게 우리가 직접 그런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남편이 뜻을 함께해줬고 당진에 있는 친척 소유의 땅을 인수해 푸른들가족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단체 생활보다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알코올중독 치료와 사회 적응을 위한 생산 활동을 한다.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이곳에서 입소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개별 치료에 힘쓰고 있다.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놀랍다. 가족과 재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만큼 뿌듯할 때가 없다. 하지만 시설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오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고, 더 많은 사람을 받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2021년 남편이 ‘장기려의도상’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상금으로 노숙인이 생활할 농막을 만들 수 있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나눔을 실천하는 게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
(조 교수) 이 일을 하다 보면 감동을 받을 때가 더 많다. 내가 성장할 수 있게 해준다. 힘들 때도 많지만 그들이 나를 의지하고 공동체를 위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가족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가 아니다. 함께 사는 가족끼리는 그런 개념이 없지 않나.

부부는 이밖에도 아프리카 유학생과 탈북 의료인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충남 천안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만난 아프리카 유학생을 위해 조 교수는 장학금을 지원하고 타지 적응을 도왔다. 언젠가 그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면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 교수는 탈북 의료인을 지원하는 ‘하나반도의료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탈북 의료인이 의사국가시험을 치르고 실습을 통해 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의사국가시험을 위해 필요한 교재 지원이나 실습 가능한 의과대학, 병원을 연계해준다. 박 교수는 “봉사와 나눔이라는 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또 일과 일로 연결된다. 여기서 도와달라면 도와주고 그러다 보면 다른 영역으로 또 이어진다. 영역 없이 확장되는 것, 그게 바로 봉사인 것 같다.

수십 년간 나눔과 봉사를 실천해왔는데 부부이자 든든한 파트너인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 교수) 봉사는 누가 시킨다고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육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숙인과 같이 매일 먹고 자는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다. 아내에겐 타고난 봉사 DNA(유전자)가 있었던 것 같다. 봉사가 체질이랄까? 그래서 고맙고 또 미안하다. 명색이 의사 부인이라고 하면 좋은 옷 입고 좋은 아파트에 살 텐데, 좋은 옷은 만무하고 월세 아파트에 산다. 뭘 더 하고 싶어도 내 월급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속상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웃으며 봉사하는 걸 보면 짠하기도 하다.
(조 교수) 고맙고 미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남편 뒷바라지나 집안일, 자녀 교육보다 내 일이 우선이었다.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고 싶을 때도 많았을 텐데 늘 이해하고 지지해줬다. 덕분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거다. 나눔을 실천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낮은 곳에서 더 낮을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목표가 궁금하다.
(박 교수) 신체적 조건이 허락하는 한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할 거다. 사람이 부족해 어려운 흉부외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나이가 더 들면 아내와 함께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
(조 교수) 마음 같아선 남편이 빨리 은퇴해서 시골 의사로 살며 시골 어르신과 지역 취약계층을 도왔으면 좋겠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그곳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지금 은퇴하는 건 능력 낭비다. 대신에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의대생들이 봉사를 경험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장을 만들고 싶다. 미래의 의료인이 의술(醫術) 아닌 의도(醫道)를 펼칠 수 있도록. 그리고 노숙인들의 자활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 예술인들과 창의적 활동도 하고 예술 전시를 열어서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기회를 만드는 거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자연스레 사회로 스며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강정미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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