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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비 오던 날의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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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몸집보다 커다란 책가방을 멘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귀여운’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비 내리는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니 정문 앞에는 우산을 든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챙겨온 우산을 펼치고 씩씩하게 교문을 나섰다.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애들을 곁눈질로 살피며 어떤 우월감을 맛봤다. “흥, 우리 엄마가 초등학생은 ‘언니’랬는데. 혼자서도 잘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깟 비쯤이야 아랑곳 않고 혼자서 하교하는 스스로를 ‘언니스럽다’고 느꼈다.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걷는데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커다란 발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작업복을 입은 낯선 아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잠시간 멍하다가 “딸”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우리 아빠임을 알아차렸다. 이 시간에 아빠가 내 앞에 있다니! 냅다 우산을 내던지고 두 팔을 쫙 벌리자 아빠가 허리를 숙여 나를 꼭 껴안았다. 아빠 품에 얼굴을 파묻자마자 예상치도 못하게 눈물이 터져나왔다. 알 수 없는 서러움이었다. 아빠는 놀라서 왜 우느냐고 물었고 나는 모르겠다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싹싹 문질러 닦았다.
우리는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뭐 먹고 싶냐는 질문에 아빠가 좋아하는 중식을 일부러 골랐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아빠는 역시 넌 내 딸이야 하며 좋아했다. 짜장면을 비비며 생각했다. 집에 가면 동생한테 자랑해야지. 학교 끝나고 아빠랑 둘이서 짜장면 먹었다고, 완전 신났다고, 부러우면 너도 얼른 커서 초등학교에 가라고.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아빠 손을 이끌고 문방구에 갔다. 나도 아빠한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다. 간식 매대 앞에서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고르라고 큰소리를 쳤다. 아빠가 고심하는 동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전 개수를 헤아렸다. 혹시라도 비싼 걸 고를까 긴장이 돼서 하도 만지작거린 탓에 동전들이 따끈했다. 다행히도 아빠는 100원짜리 사탕 하나를 골랐고 나는 ‘이 맛에 아빠 구두 닦지’ 하는 마음으로 달궈진 동전을 내밀었다. 문방구 아줌마가 딸이 사주는 거냐며 아빠를 부러워했다. 가슴께가 뿌듯함으로 빵빵해졌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지출이었다.
사탕 하나씩을 우물거리며 걷는데 아빠가 물었다.
“딸, 만화책 본 적 있어?”
동화책을 떠올리며 “집에 많지 않냐”고 했더니 아빠가 ‘어휴, 넌 한참 멀었구나’ 하는 표정으로 으스대며 말했다.
“진짜 만화책을 보여줄게.”
아빠 손을 잡고 만화방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 중 내가 제일 어렸다. 왠지 가슴을 펴고 꼿꼿이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아빠는 무협지를, 나는 토끼가 그려진 만화책을 골랐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만화책을 후루룩 넘기는데 아빠가 말했다.
“딸, 여기 온 건 엄마한테 비밀이다. 그리고 이런 덴 아빠하고만 오는 거야.”
토끼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아빠는 만화책에 빠져 있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헐거워진 내 양 갈래 머리를 풀어 야무지게 땋기 시작했다. 아빠가 이런 곳에서 날 너무 아기 취급하는 것 같아 남부끄러웠지만 아빠가 너무 좋아보여서 한 번쯤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아빠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마터면 아빠한테 너무 귀엽다고 말할 뻔했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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