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리 음악의 아버지’가 된 기차 제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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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 시기, 남부 애팔래치아 산맥 부근으로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지중해 출신 이민자들이 거진 300년 동안 유입됐고 애팔래치아 / 블루그래스 음악은 그렇게 융성했다.
국토가 점차 서쪽으로 확장되면서는 미시시피 강과 루이지애나가 컨트리 음악의 교차로가 됐고, 이후 텍사스에 까지 도달하면서 컨트리 음악은 20세기 초 미국 남서부 시골 백인들의 전통 같은 것이 되었다.
1920년대 무렵 컨트리 음악의 스타일이 확립됐다. 이는 도시 음악과는 확연히 구분됐다.
컨트리 음악은 외딴 곳에서의 단순한 삶, 텍사스 특유의 넓고 자유로운 분위기부터 독립적인 소규모 농장에서의 삶 등 주제의 규모가 어찌됐든 흙과 풀내음이 나는 분위기를 다뤄왔다.
그 와중에 지미 로저스는 미 전역에 알려진 최초의 컨트리 스타가 됐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컨트리 음악은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경쟁력을 지니게 된다.
지미 로저스 또한 다른 여러 장르의 개척자들처럼 이것저것을 조합해냈는데, 철도 관련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카우보이의 컨셉을 가져다 쓰기도 했다.
또한 흑인 노동자들의 블루스에 유럽 이민자들에게서 온 리드미컬한 요들 창법을 접목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의 혼합이 소위 컨트리 뮤직의 핵심이 된다.
지미 로저스가 구축한 프레임은 후대 아티스트들에게로 이어졌고 이는 시대를 초월한 미국 음악의 표준이 됐다.
밥 딜런부터 레너드 스키너드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았고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불려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미 로저스는 짧은 생을 살다 갔다.
음악을 시작한 1927년부터 1933년 사망직전까지 약 6년 동안 녹음한 100여 곡의 노래들은 컨트리, 그리고 미국 음악계 전반에 중요한 유산이 됐다.
‘컨트리 음악의 아버지’ 이외에도 지미 로저스는 몇몇 별명들을 가지고 있었다. 블루스와 요들을 합쳤다는 의미에서 ‘블루 요들러’, 그리고 기차 제동수로 일했기 때문에 ‘노래하는 제동수(Brakeman)’라 불리기도 했다.
특히 지미 로저스는 ‘Blue Yodel’ 시리즈를 차례로 성공시켰다. 총 13개의 ‘Blue Yodel’은 제각기 소 제목을 지니고 있었고 이 연작을 계기로 스타덤에 올랐다.
유쾌하고 구성진 꺾기가 일품이었지만 전반적으로 심각한 내용의 가사들을 다루고 있었고 여기에 행복한 결말은 거의 없었다.
지미 로저스는 컨트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컨트리 음악에 항상 요들 창법이 포함된다 생각하게 할 정도로 요들을 컨트리의 트레이드 마크로 만들어 버린 인물이다.
하지만 요들의 본고장인 알프스 민속 음악에 있는 3/4박자 대신 지미 로저스의 요들에는 블루스의 4/4박자가 활용됐다.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이었던 지미 로저스의 가족은 미시시피주 머리디언에 정착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지미 로저스는 학교를 거의 다니지 않았다.
13세 무렵 지역 노래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메디슨 쇼(Medicine Show: 한국의 약장수 공연과 매커니즘이 정확히 일치한다)를 따라다니면서 미국 남부를 횡단하며 노래했다.
이후 방랑을 멈추고는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 철도회사에서 일한다. 처음에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물을 날라주는 일을 했는데, 그 무렵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멕시코계 노동자들로부터 다양한 음악을 흡수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불려지는 노동요에 영향 받아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킨 지미 로저스는 일을 하는 와중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간다. 이후에는 수하물 취급자가 됐고 다음에는 제동수가 됐다.
1924년 무렵, 지미 로저스가 결핵 진단을 받으면서 건강 문제로 철도 일을 그만둔다. 그리고는 음악 경력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면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밴드를 전전하던 도중 녹음할 기회를 얻은 지미 로저스는 ‘Blue Yodel No. 1 (T For Texas)’의 성공으로 명성을 얻는다.
이후에도 ‘Blue Yodel No. 4 (California Blues)’, ‘Waiting for a Train’ 등 내놓는 곡들을 족족 성공시켰다. 특히 ‘Waiting for a Train’의 경우 미국 대공황 기간과 맞물리면서 돈이 없는 부랑자의 삶을 다룬 가사가 유독 사랑받았다.
하지만 지미 로저스의 건강은 점차 악화된다.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투어를 계속 진행했고 그런 강행군 끝에 공연 직전 대기실에서 쓰러지는 일도 발생했다.
공연을 위해 방문한 텍사스가 결핵 환자에게 좋은 환경인 건조한 공기와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텍사스 케르빌에 정착한다.
텍사스에 정착하면서는 무대 복장 또한 변화를 줬는데, 과거 즐겨 입던 기차 제동수 복장에서 정장과 카우보이 모자로 스타일을 바꾸게 된다.
9분짜리 단편 뮤직비디오 을 찍는다 거나 ‘Blue Yodel No. 9 (Standin' on the Corner)’를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녹음하는 등 커리어는 꾸준히 순항했지만 건강은 계속 악화되면서 쓰러지고 출혈하기를 반복했다.
콘서트 역시 중단되거나 취소되기 일수였다. ‘My Time Ain't Long’ 같은 곡을 부를 때는 정말로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고 청중들 또한 지미 로저스가 자신의 병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녹음 세션은 계속 진행시켰다. 녹음을 위해 잠시 뉴욕에 머문 지미 로저스는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고 간이 침대에서 쉬어 가면서 노래를 녹음했다.
그의 컨디션 때문에 스튜디오에는 간호사가 배치됐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그렇게 녹음 세션을 어렵게 종료하고 이틀 후인 1933년 5월 26일, 10년 동안 그가 투병했던 질병이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35세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지미 로저스의 유산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단순히 음악적인 유산들 이외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한 1982년 영화 <고독한 방랑자 (Honkytonk Man)>의 경우 대공황 시대에 결핵을 앓고 있는 컨트리 가수를 다뤘다는 점에서 지미 로저스의 삶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라 할 수 있었다.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항상 웃는 이미지를 유지했던 지미 로저스는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다뤄내는 듯 보였다. 질병과 이별, 폭력과 빈곤 등의 문제를 웃으며 노래했던 그의 노래 들에는 낙천적인 유머가 공존했다.
인종차별 제도인 ‘짐 크로우’ 법이 만연하던 시기임에도 흑인, 네이티브 아메리칸과의 문화적 교류를 도입해내면서 이후 대중 음악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시기 그의 발상은 비범한 것이었고 이는 새로운 표준이 됐다.
실제로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있는 지미 로저스의 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미 로저스는 컨트리 음악 분야에 있어서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이다”라고.
☞ 추천 음반
① My Rough and Rowdy Ways(1960 / RCA Victor)
여러 곡을 담을 수 있는 LP(Long Play) 매체가 등장한 것이 1948년이니 1933년 사망한 지미 로저스는 살아생전 78회전 포맷만을 발표했다.
사후에서야 그의 곡들을 모은 LP 레코드들이 발매됐는데, 이 경우 다양한 히트곡들을 알차게 수록해내기도 했지만 고즈넉한 앨범 커버 또한 운치 있다.
②V/A - The Songs of Jimmie Rodgers (A Tribute)(1997 / Columbia)
무려 90년대 중반에 기획된 트리뷰트 앨범으로 앨리슨 크라우스나 윌리 넬슨 같은 컨트리 아티스트부터 디키 베츠, 제리 가르시아 같은 기타 영웅들, 심지어는 밴 모리슨과 U2의 보노에 이르기까지 그가 후대에 얼마나 다양하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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