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적 개인주의 vs 자유공동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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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정부는 최근 공공재, 공정·투명한 거버넌스(협치), 공정한 정부 개입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것은 민생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정부 개입으로 자유와 시장경제 원칙에 대한 변화는 없다고 했다. 정부는 2월 20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공공요금의 인상 폭과 속도를 조절하고 금융·통신 분야의 과점 상태 기업들이 특수 효과를 얻은 것에 대해 국민과 고통 분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월 3일 납세자의 날 축사에서 “공익 목적을 벗어나 국익을 해치는 정치 집단화된 단체에는 혈세를 쓰지 않을 것”이며 ‘포퓰리즘적 정치복지’가 아닌 ‘취약계층을 위한 약자복지’를 실천하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과 정부의 정책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고전적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적극적 자유관에 입각한 근대(사회적)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지난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윤석열정부의 국정철학은 자유주의의 재정립이다. 이때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아실현뿐 아니라 국가가 복지를 제공하고 자본주의 규제에 적절히 개입하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뜻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냉전자유주의의 고착화 및 기득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진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는 숙고해야 할 과제다. 한국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자유주의 사조의 하나는 자유공동체주의다. 이는 1980~90년대에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으로 대두했다. 자유공동체주의는 서구 사회가 개인주의에 함몰된 나머지 사회 원자화 경향에 따른 사회·심리학적 문제, 예를 들어 정치적 무관심과 소외의 증대, 무절제한 탐욕, 고독, 도시범죄, 높은 이혼율 등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서구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함으로써 공동선을 외면하고 공공문제에 대한 시민적 덕목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자유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공동체 바깥이나 그 이전에 존재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사회와 관계없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며 결국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행태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찰스 테일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자 정치적 동물인 이유는 혼자서는 자급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유 사회의 성패는 개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유와 개인적 다양성의 가치를 증진시킨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정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정의론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이 자아를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족이나 종교 집단과 같은 다양한 공동체의 일원임을 경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이론이 보편타당성을 지닌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자유주의는 동질적인 개인들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현대의 모든 개인이 복잡한 사회관계의 한 부분이며 여러 형태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문화와 사회관계 속에서 구성되므로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추상적으로 형성되는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일관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이클 왈저에 의하면 개인은 다양한 공동체와 사회영역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며 상호 공유하는 사회적 의미의 도덕과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저마다의 특수성을 지닌 가치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서구 자유주의 이상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도전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1990년대에 일어났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가 제창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다. 사회 이익이 개인 이익보다 우선하는 공동체적 가치가 미국식 개인주의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후일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교문화 질서가 비자유적임에도 현대에 적절한 제도일 수 있다는 논쟁을 낳기도 했다. 공동체주의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권위주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자유공동체주의는 서구 자유 사회의 문제에 대한 지성적 대안으로 제시된 사조다. 개인과 사회 간,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 이익 간, 공동선과 자유, 권리와 의무 간에 융통성 있는 형태의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다. 공동체에 잘 통합된 개인은 고립된 개인보다 훨씬 더 책임감 있게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압력이 너무 커지면 개인 자아가 손상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최근까지 ‘반응적(Responsive) 공동체주의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아미타이 에치오니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와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의 정강 정책에 영향을 줬다. 그는 사회적 단편화와 붕괴는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호혜적인 의무와 책임에 대한 거부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신들의 경력이나 생활 즐기기를 더 중요하게 여김에 따라 부모로서 부담을 포기하는 ‘부모역할결핍증(parenting deficit)’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 역시 공동선과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 사이의 두 주요 규범적 가치를 균형적으로 조화시키는 ‘좋은 사회’를 추구한다.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가 왜곡되고 민주주의가 과부하에 걸리면서 대립과 배제의 균열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념적, 지역적, 계층적, 양성적, 세대 간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경제적 양극화 증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과 노동의 유동성 상실, 청년 일자리 부족과 저성장 기조의 현실 속에서 저출산·고령화의 인구절벽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이것은 그동안 성공국가로서 신화를 이룩한 역설적 이면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위기에 강한 국민으로서 자유공동체주의가 그 대안으로서 혜안을 제시하는 시대정신일 수 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한국정치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연세대 행정대학원장, 국가관리연구원장을 거쳤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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