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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부 승격은 국가의 핵심 가치인 책임·존중·기억을 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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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
어떤 나라는 전쟁을 통해 탄생했고 어떤 나라는 부단한 정권교체로 현재 모습을 만들어냈다. 어떤 나라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보훈으로 이뤄진 국가다.
독립운동, 6·25전쟁,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희생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희생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되짚는 ‘보훈(報勳)’ 개념은 그래서 중요하다.
보훈에는 책임·존중·기억이라는 가치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군·경과 소방공무원이 없으면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훈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의 말이다.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 소장의 원래 이름은 존 앨더먼 린턴으로 인요한은 그가 2012년 특별귀화자 1호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며 지은 이름이다. 본관도 새로 얻었다. 순천 인씨다.
그러니까 인 소장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전남 순천에서 자란 ‘전라도 토박이’다. 그의 아버지 휴 린턴도 마찬가지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에 입대해 6·25전쟁의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던 참전용사다. 린턴 가문이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게 인 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턴이 22세 되던 때의 일이다. 윌리엄 린턴은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도 했다. 윌리엄 린턴은 샬럿 벨과 결혼했는데 샬럿 벨의 아버지 유진 벨은 1895년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였다. 전남 일대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우며 사람들을 이끈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 6·25전쟁 등 근현대사가 인소장 선조의 역사에 담겨 있다면 인 소장에게는 현대 한국사가 담겨 있다. 인 소장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영어통역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인 소장은 당시 광주의 소문을 듣고 어렵게 광주로 진입했다가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시민군을 도왔다. 그 때문에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인 소장 스스로 “3대가, 그것도 외국인이 보훈 대상과 관련 있는 경우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인 소장 가족의 역사는 곧 보훈의 역사다.
그런 인 소장이 보훈처의 정책자문위원장을 맡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 소장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대한민국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책자문위원장으로서 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한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1월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업무보고 자리에서 얘기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가난하고 약한 나라가 아니다. 그동안은 성장하는 데만 신경을 쏟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선진국으로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국가의 정책 방향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3월 2일 ‘정부조직법’ 공포안 서명식에 참석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보훈‘처’를 ‘부’로 승격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한 부처가 승격되는 일이 아니라 국가가 중요시해야 하는 가치를 강조하는 일이다. 보훈에는 책임·존중·기억이라는 핵심 가치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군·경과 소방공무원이 없으면 국가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그냥 떠넘겨서는 안된다.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한다. 존중이라는 가치가 요즘 사라지고 있는데 그게 참 아쉽다. 반면 미국을 보면 미국의 보훈부, 정확히 말하면 제대군인부(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는 국방부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조직이다. 그만큼 보훈을 중요시한다는 얘기다.
보훈의 가치가 퇴색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전남 순천에서 군불을 때워 데운 온돌방 아랫목에서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온돌방 아랫목은 지식을 배우고 지혜를 배우고 도덕을 배우는 자리였다. 그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것은 인간의 됨됨이를 벗어나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만큼 중요한 것이 체면(體面)이라는 것이다. 미국 남부식으로 말하면 명예(honor)다. 체면을 지키며 살아라,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라. 이런 가치를 배우는 자리가 요즘은 없다. 온돌방 아랫목이 사라져서다.
대신 자리잡은 것은 무엇인가?
지혜 대신 지식이 자리잡았다. 지식이 너무 많은 시대다. 정보는 많은데 골라낼 지혜는 없다. 사실 지혜는 어른들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세대가 모이는 ‘베뉴(모임이 열리는 장소)’가 없다. 세대 단절은 큰 문제다. 어른들은 존중받지 못하니까 자신의 나이 듦에 허탈감만 느낀다. 어린 세대는 누구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른다. 어른에게 가치를 배우고 지혜를 배워야 하는데 그게 사라지고 지식만 남았다.
인 소장은 어른에게서 어떤 지혜를 배웠나?
나는 직업적으로 후배 의사들을 가르칠 때 항상 아이큐(지능지수), 이큐(감성지수) 그리고 ‘눈치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큐는 말 그대로 지능이다. 지식이 있어야 질병을 고칠 수 있다. 감성지수, 환자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는 자세는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눈치큐다. 이건 단체생활과 관련이 있는데 단순히 임기응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뭘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이다. 상대방과 원활하게 지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걸 나는 온돌방 아랫목에서 형제들과 부대끼며 배웠다.



인 소장 가족의 역사는 한국에 대한 희생으로 채워져 있다. 인 소장의 형 스티브 린턴 역시 한국 국적을 취득해 인세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그는 진외증조부인 사회사업가 유진 벨의 이름을 딴 유진벨재단의 회장을 맡고 있다. 유진벨재단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비정부기구다. 조카인 데이비드 린턴, 한국 이름 인대위 변호사는 얼마 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족의 역사를 설명해 감동을 이끌어낸 바 있다.
어떻게 온 가족이 한국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지킬 것은 지킨다’는 가르침 덕분이다. 할아버지는 신사참배에 불응하다가 미국으로 쫓겨났다. 아버지는 공산주의는 옳지 않다는 원칙에 따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나 역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옳은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을 좋아한다. 처칠이 했던 일 중 한 일화가 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는데 런던이 독일의 집중포화를 맞기 전 독일군 포로들을 런던의 외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아무리 적국의 전쟁 포로라 하더라도 자신의 나라 포탄에 맞고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연히 많은 돈이 들었고 반대에 부딪혔지만 처칠은 군인의 명예를 존중해줬고 지킬 것은 지켰다.
왜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머물렀나?
나고 자란 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그랬다고 한다. 6·25전쟁 이후 가난하고 힘든 한국을 보면서 애틋한 마음을 가진 것이다. 나 역시 의사면허를 따고는 미국에서 4년간 머무르기도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 소장의 본업은 의사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가 처음 생길 때부터 외국인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에게는 의술과 관련해 아픈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1984년 고향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휴 린턴은 사고가 난 후 응급환자를 볼 수 있는 광주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다가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에도 구급차가 있었지만 응급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장치가 아예 없어 단지 이송 역할만 했다. 인 소장은 이를 계기로 승합차를 개조해 한국형 구급차를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구급차를 기반으로 전국 곳곳에 현재 형태의 구급차가 생겨났다.

의사 인요한은 어떤 의사인가?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한다. 환자의 관점에서 의술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린 아이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사건이 있었다. 자기공명영상장치(MRI)를 찍어봐도, 소아외과 전문의가 가서 봐도 가망이 없었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정도였다. 모두가 아이의 생존을 포기하고 있었을 때 ‘아이를 진료해보자’고 내가 나서서 환자를 받았다. 두 달쯤 지났을까. 아이가 일어나 ‘굿모닝(안녕)’이라고 인사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반쯤 의심하는 마음으로 회진을 갔다. 정말로 아이가 눈을 떠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아이는 재활에 힘써서 이제는 운동도 곧잘 한다고 들었다. 환자 입장에서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에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인간 인요한을 얘기하는 자리에는 늘 순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순천은 내 고향이다. 은퇴하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싶다. 순천의 한자가 따를 순(順), 하늘 천(天)으로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순천에서는 거스르는 것이 없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 많다. 그곳에서 나는 ‘인쨘이’라고 불렸는데 아직도 순천에 가면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
보훈처 정책자문위원장으로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크리스마스이브에 ‘보훈 산타’가 돼 아이들을 찾아간 일이다. 전몰·순직 군경의 어린 자녀들 집을 직접 방문해 선물을 전달하곤 했는데 이런 이벤트가 아이들은 물론 국민에게도 보훈정신을 떠올리고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보훈과 관련된 목표가 있나?
나는 중요한 목표가 2개 있었다. 하나는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가 용산에 보훈공원을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는 곳곳에 보훈 상징물이 조성돼 있다. 관광객은 물론 시민에게도 보훈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서울의 한복판 용산에도 이런 장소가 필요하다. 사람이 모여들고 자연스럽게 호국보훈의 정신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들도록 도울 것이다.

김효정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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