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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게 다 게으른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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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한 저축은행 지점에 근무하는 네 젊은이의 엇갈린 연애 얘기를 다룬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가 화제였다. 문가영, 유연석 등 젊고 매력적인 연기자들의 출연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더 큰 화제는 느리고 답답한 전개 방식이었다. 도대체 주인공들이 속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지 않는 바람에 ‘고구마 100개 먹는 기분으로 보고 있다’는 시청자들의 소감이 쏟아진 것이었다.
나도 초반에 그 드라마를 욕하면서 봤는데 생각해보면 주인공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즉각 다 말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다만 대부분 드라마는 그런 망설임의 과정을 생략하고 주인공들이 목표 지점을 향해 명쾌하게 달려가는데 이 드라마는 인물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실시간으로 다 보여주니까 시청자들이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만큼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품도 없다.
드라마가 종영되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웃으며 읽다가 문득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어느새 우리는 느긋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뭐든 빨리빨리 결론을 내는 걸 선호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가 쓴 책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 요즘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대사 없는 일상적인 장면을 건너뛰는 것은 물론 1시간짜리 드라마를 10분 요약 영상으로 해치우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워졌다고 한다. 예전엔 결말을 얘기하면 스포일러라고 욕을 하던 사람들이 이젠 영화관에 가기 전에 결말을 미리 알아두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화제의 드라마 12부작을 1시간 만에 마스터한 적이 있다. 내가 가입하지 않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1시간으로 편집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하루 24시간은 586세대든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 같은데 왜 세대를 막론하고 바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됐을까?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뒤처지거나 한눈팔면 안된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듣고 살아서 그런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라는 동화에서 배웠듯이 일 안하고 노는 사람은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나쁘다는 인식을 기본 장착한 삶을 살다 보니 천천히 움직이거나 느긋하게 하는 것을 죄악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수영장에 가서도 편하게 수영을 해본 적이 없다. 몸에 힘을 완전히 빼고 배영으로 떠 있고 싶지만 한 번도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서’였다. 바쁜 세상에 수영도 빨리 하고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도 모르게 생겨버린 것이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할 때 천천히 하셔도 돼요”라는 공익 캠페인 메시지를 들었다. 무인주문시스템을 뜻하는 키오스크가 노인세대를 간편식 체인점에서 몰아냈다는 뉴스를 듣고 우울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느긋하게 사는 게 다 게으른 건 아니라는 믿음이 아직은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편성준
유머와 위트 넘치는 글로 독자를 사로잡은 작가.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썼다. 현재 다양한 채널에서 글쓰기와 책쓰기 강연을 하고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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